블라디보스톡 여행기 2-'나'보다 '우리'를 생각하자

<해직교사가 쓰는 밖에서 하는 종례>

등록 2003.06.30 10:36수정 2003.06.30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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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로 블라디끄는 '정복하다, 정벌하다'의 뜻이고 보스또끄는 '동쪽'이란 뜻이란다. 그러니까 블라디보스톡은 '동방정벌'이란 뜻이 되는 셈이지.


원래 중국 영토였고(물론 저 옛날에는 우리 조상인 '발해'의 영토였지만) 그 때는 해삼위라고 불렀지.('해삼'이 많이 나는 고장이란 뜻이겠지) 러시아가 태평양을 통한 세계 진출이라는 전략 속에서 특히 부동항(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이곳을 자기 영토로 삼는 것은 중요한 목표의 하나였고 마침내 1826년 청나라로부터 이곳을 빼앗아 러시아 영토로 삼았지.

그래서 아직도 중국 사람들은 이곳을 회복해야 할 자기네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구나. 어쨌든 이곳은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가 100년 이상 주둔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 도시가 속한 연해주는 면적이 남한의 1.7배 정도 되는데 현재 인구는 200만 정도가 산다는 구나. 우리 한반도와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곳이 연해주인데 '토만'이라는 러시아어의 뜻이 '물안개'라는 구나. '물안개가 자주 피는 강'이라는 러시아어에서 두만강이라는 이름이 굳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산업은 임업과 수산업이다. 인근에서 잡히는 엄청난 양의 생선은 주로 일본, 우리나라 등으로 수출하고, 연해주 북쪽의 원시림에서 생산되는 원목들 또한 일본, 우리나라와 동남아, 미국 등으로 수출한다고 한다. 최근에는 군사도시를 벗어나 관광도시로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경제력이 약해서 아직 눈에 띌 성과는 없어 보였다.

이 곳 블라디보스톡은 우리 민족의 한이, 그리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다. 17일 오전에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기로 하고 나섰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신한촌 기념탑문이다. 일제시대 때 조국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이곳으로 건너와 자리 잡은 동포들이 많았고, 그들을 중심으로 1919년에는 임시정부인 국민의회를 건설하고 이 도시에 본부를 두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도 이곳에 살면서 훈련을 하고,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으로 떠났다.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비도 이곳 시내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는데 그곳은 가보지 못했다.

1937년에 이르면 이 도시에 이주해 정착한 우리 민족이 13만 가구, 약 30만 명이 넘었고 그들이 강한 생활력으로 자리잡고 이룬 한인촌의 이름이 '신한촌'이었단다. 그런데 그 해 스탈린은 우리 한민족을 일본이 침략해 올 경우 협력할 위험이 있는 '예비 범죄자'로 간주하고, 처벌 차원에서 30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의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곳곳에 강제로 소개시켜 버리고 말았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무 죄도 없이, 고국을 떠나 열심히 생활하던 우리 동포들은, 하루 아침에 사람이 살지 않는 또다른 낯선 고장인 중앙 아시아 곳곳에 던져져 버린 셈이지. (그때 그분들이 겪은 표현하기 힘든 고통과 처절한 삶의 기록은 조정래님의 '아리랑'이란 책에 잘 나와 있다. 도서실에 가면 그 책이 있을 테니 찾아 읽어보면 좋겠구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렸던 그 분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 1998년이었다. 61년 만에 그 때 러시아의 조치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신한촌이 있던 그 자리에 기념탑을 세우고 비문을 새겨놓은 것이다.

우리 일행 여섯 명은 오래오래 그 앞에 서서 묵념을 올리고, 그 분들이 60여 년 전 바랐던 조국 독립이 지금은 조국 통일이란 과제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했다. 남쪽과 북쪽에서 온 사람 여섯이 함께 그 앞에서 묵념을 올린 것도 혹 처음이 아니었을까?

안타까운 것은 러시아 민중의 일부는 자기들의 잘못을 인정한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 가끔 탑신에 스프레이로 욕설을 써 놓는 야비한 짓을 하는 일이 더러 있다는 것이다. 마치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한반도 침략을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듯이. 그 날도 탑신에 써 놓은 욕설을 지운 흰 페인트 자국을 보아야 하는 마음이 많이 씁쓸했다.

재래 시장도 들러 봤다. '상추'를 보고 북에서 온 분이 "부루가 싱싱합네다." 그렇지. 상추쌈을 옛날에는 부루쌈이라고 불렀었지. 북쪽에는 우리말이 살아 있는 경우가 참 많지.

이곳 러시아 사람들은 자존심 강하고, 그래서 상인들도 서비스 정신이란 게 거의 없다. 심지어 손님이 먼저 웃어도 함께 웃어주는 일도 드물다고 한다. 서울이나 평양이나 우리 민족의 친절함은 참으로 대단하지. 남북이 함께 그 사실을 확인하며 즐겁게 웃었다.

2차 대전 때 큰 공을 세웠다는 C-56(에스 56으로 읽는다) 잠수함을 뭍에 끌어내 놓고 박물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변에는 2차 대전 때 숨진 해군 장병들과 공이 큰 장교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동판벽이 있고 2차 대전 기간을 상징하는 '1941'과 '1945'라는 글씨 사이에 꺼지지 않는 불꽃이 놓여 있다. 전쟁을 영원히 기억하자는 뜻이란다.

도심에 있는 빨치산 거리와 빨치산 공원도 보았다. '파르티잔'이란 비정규 유격대원을 말하지. 이 도시와 연해주의 자연과 역사를 함께 전시한 박물관도 들르고, 이 도시에 하나밖에 없다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이그나프 산업센터도 들러봤다. 우리의 백화점에 해당하는 곳인데 2002년 8월 29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방문해서 선물했다는 도자기를 자랑스럽게 진열하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경제를 살리는 일이 최대의 절대절명 과제가 되어 있다보니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도 외국을 가면 중국을 가든 러시아를 가든 공장이나 백화점 같은 곳을 열심히 찾아 배우려고 하는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이지. 하루빨리 우리 민족이 통일되어 7천만 전체의 번영을 함께 일굴 수 있어야 할 텐데....

바닷가를 보면서도 시내를 돌아다니면서도 '겨레' 그리고 '통일'과 '평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삶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어디서든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며 정성껏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다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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