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 수 없는 단장의 압록강

항일유적답사기 (47) - 압록강

등록 2003.06.30 13:20수정 2003.06.3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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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 박도

장군총에서 돌아오면서 압록강에 들렀다. 강 건너 빤히 보이는 곳이 북한의 만포(滿浦)였다. 강 이편에서 부르면 강 저편에서 대답할 수 있는 거리로 그야말로 지호지간이었다.

하지만 나그네는 배가 있어도 ‘건널 수 없는 강’으로, 내 나라이면서도 마치 남의 나라로 여기면서 이국 땅에서 아픈 마음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내 조국 산하를 바라만 보았다.

북한의 산들은 나무들이 별로 우거지지 않았다. 멀리 국기 게양대에는 북한의 인공기가 펄럭거릴 뿐, 팽팽한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 적막 강산이었다.

‘물빛이 오리 머리 빛과 같다’하여 압록(鴨錄)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강은 백두산 남동쪽에서 발원하여 중국 동북지방과 국경을 이루면서 황해로 흘러간다. 이 압록강은 그 길이가 790여 킬로미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압록강도 두만강과 함께 일제시대에 이 땅의 백성들이 정든 고향을 등지고 북간도로 쫓겨갔던 애환이 서린 강이었다.

마침 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기에 예까지 온 기념으로 압록강 강물에 손이나마 적신 후, 기념촬영을 하려고 내려갔다. 돌덩이에는 ‘중조 압록강((中朝鴨綠江)’이라고 흰 바탕에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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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 국경인 압록강 ⓒ 박도

거기서 사진을 두어 장 찍은 후, 강물에 손을 닦고 나오는데 “여기서 사진을 찍은 사람은 일인당 2원을 내십시오.”라는 팻말이 있었다.

분명 내려갈 때는 그런 글귀가 보이지 않았는데, 오를 때만 보이게 팻말이 놓였고, 그 곁에는 늙수그레한 중국 여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4원을 주고 나오면서 어쩐지 입맛이 씁쓸했다.

여기서도 중국인들은 우리나라 분단을 이용해서 철저히 돈을 챙기고 있었다. 도문에서도 그랬다. 아니, 중국만 그런 게 아니고 주변 강대국들 모두가 그런지도 모른다.

분단 극복은 우리 겨레가 이루어야지, 외세의 힘을 빌리면 그네들의 국익에 이용당하는 또 다른 절름발이 통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은 때는 바로 고구려 광개토대왕 재위 시절이다. 대왕은 정복 군주로서 남으로는 한강 이남까지 진출하였고,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였으며, 숙신(肅愼)을 굴복시켜 지금의 하얼빈 일대까지 차지하는 전성기를 이뤘다.

강한 지도자는 국토를 확장시키고 백성을 배불리게 한다. 우리가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한때의 흘러간 영화였다.

조상이 아무리 영토를 넓힌들 그 후손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남가일몽에 불과하다. 나는 집안을 떠나면서, 다가오는 21세기에는 분단된 국토를 통일시키고 나라의 힘을 세계 만방에 떨칠 광개토대왕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중국인들의 만만디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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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운반점의 자매 ⓒ 박도

오후 4시 10분 청하(淸河)에 도착했다. 바쁜 일정으로 그제야 늦은 점심을 들었다. 길가 재운반점에 들리자 자매가 싱글벙글 대환영이었다.

비교적 중국냄새가 덜 나는 맛깔스런 요리를 푸짐하게 내놓았다. 한창 시장하던 참이라 맛있게 먹었다. 두 여인이 얼굴이 비슷하고 나이 차가 많아 보여서 처음에는 모녀간인 줄 알았더니 자매간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얼굴 표정과 상냥한 말씨로 손님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우리 일행이 떠날 때는 그들 자매가 밖으로 나와서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 친절이 아름다워 자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행 중에 원주민으로부터 받은 친절은 오래도록 남으며 그 지방의 인상을 좋게 기억한다. 친절은 가장 좋은 관광 자원이다. 내가 ‘청하’하면 두고두고 그들 자매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6시 30분, 신빈(新賓)으로 가면서 그동안 아스팔트길을 잘 달렸는데 갑자기 비포장 도로였다. 장마로 노면의 굴곡이 심해서 마치 파도를 타는 기분이었다.

이곳 지리에 밝은 김 선생님은 비포장 도로부터 요녕성(遼寧省)이라고 했다. 중국은 성(省)마다 독립채산제라 그 성의 재정 형평에 따라 도로 사정, 통행료가 다르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어느 새 길림성에서 요녕성으로 들어선 셈이었다. 구름 낀 탓인지 날도 어지간히 저물어 땅거미가 스멀스멀 지고 있었다.

이곳 도로에는 이따금 소 떼, 양 떼, 오리 떼가 길을 막았다. 동물들도, 그들을 몰아가는 주인도, 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신들이 알아서 가라는 유유자적한 걸음새였다.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인가 보다. 가축조차도 주인을 닮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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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가득 메운 양떼들 ⓒ 박도

하긴 어차피 유한한 인생, 팔딱팔딱 조급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산다고 내 수명이 더 연장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건강만 상할 테다. ‘욕속부달(欲速不達)’이라고 한 바, 일을 너무 급히 서둘면 도리어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내 주위를 돌아보아도 팔딱거리는 사람이 치신머리도 없어 보일뿐더러, 대체로 암에 많이 걸리고 단명하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모름지기 중국인들의 유유자적한 만만디 정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중국 양자강의 오리 장수는 상류에서 오리 새끼 몇 마리를 부화시켜서 가족과 가구를 배에다 싣고 하류로 쉬엄쉬엄 흘러가면서 그 오리를 기른다.

강을 따라 흘러가는 새, 새끼는 어미가 되고, 그 어미가 낳은 알은 다시 부화시키고…. 그렇게 두세 해를 보내면서 하류에 이르면 오리는 기하급수로 불어나 수천 마리가 된다.

주인은 오리를 도매상에게 넘기지 않고 상하이 거리에 주저앉아 몇 달이고 간에 다 팔아치운다. 그런 후에야 다시 상류로 거슬러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양자강을 오르내리면서 자식도 낳고 손자도 본다. 그렇게 몇 차례 오가면서 평생을 보낸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이런 만만디 정신은 정치·경제·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엿볼 수 있다. 한때 포르투갈에 빼앗겼던 마카오, 영국에 빼앗겼던 홍콩을 서둘러 찾지 않고 때를 기다려 찾았다. 지금까지 대만도 내버려두고 있다. 때가 되면 제 풀에 돌아온다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모양이다.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다. 중국 인민의 90 퍼센트 이상은 한족(漢族)이고 그 나머지는 무려 55개나 되는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 이 소수 민족 중에는 조선족 200만도 포함돼 있다.

중국은 이들 소수 민족에 대해서도 만만디 정책을 펴고 있다. 이민족에게 강압으로 동화 정책을 펴지 않고 소수 민족의 자치도 인정하고 있다. 중국 변방에는 소수 민족의 자치주가 여럿이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도 그 하나이다.

중국은 일본처럼 단시일 내에 어떤 결과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일제의 ‘창씨개명’, ‘황국신민화’ 정책은 이민족에 대한 반감만 키우고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볼 때 만만디 정신은 느슨해 보이지만 도리어 그 뒷면은 무서운 중국인의 정신이다. 이민족도 오랫동안 자기네 땅에서 살다보면 끝내 한족에게 동화 흡수되리라는 게 그들 중국인의 잠재된 생각일 것이다.

임어당은 중국인의 성격을 ‘원만·인내·무관심·노회(老獪)·평화주의·지족(知足)·보수주의’ 등으로 설명하였다. 여기에 빠진 게 있다면 그들의 자존심, 곧 중화사상(中華思想)이다.

그들은 일찍이 인류문명을 일으켰다는 자긍심이 대단하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으로 여기고 대국의 체통을 지키려는 잠재의식 또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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