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으로는 니한테 잘 할게...

출산 후 아픈 아내를 위해 사골을 끓였습니다

등록 2003.07.04 09:46수정 2003.07.0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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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아내는 무척 힘들어 했었다. 다행히 아내는 둘째를 낳고 한동안은 첫째를 출산했을 때보다 한결 건강이 좋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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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원

첫째 때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그만큼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형편상 산후조리를 한 달밖에 하지 못하고 일터로 나가야만 했다. 쉬지도 못하고, 핏덩어리를 남의 집에 맡겨놓고 일하러 가야만 하는 아내를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내 처지도 참 처량했다.

서울 하늘 아래 아내와 나를 제외하고는 의지할 데도 없으니 둘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조금 위안을 찾는다면 그나마 아내의 몸이 첫째를 출산한 후보다는 나아졌다는 정도다.

아내는 꿋꿋하게 아이를 키웠다. 물론 나의 외조도 한몫을 했지만 어찌 내가 하는 집안 일을 아내의 손길에 비교할 수 있을까? 가끔씩 아이 둘을 키우면서 짜증을 내기도 하고 싸운 적도 있지만 서로 의지하며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우려하던 대로 아내의 건강에 적신호가 생겼다.

아내는 남들보다 추위를 좀더 타고, 가끔씩 비가 오거나 흐린 날 발목이 시리다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출산 후 대부분의 산모들이 겪는 고통쯤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첫째를 출산하고 쓰러지고 하던 때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이어서 걱정은 되었지만 심각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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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 달 전부턴가 아내는 자꾸 눈밑이 떨린다고 했다. 가끔씩 피곤하거나 영양섭취, 그 중에서도 마그네슘이 부족할 경우 그런 증상이 생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휴식과 함께 영양제를 복용하면 금방 나을 줄 알았다. 끼니를 잘 챙겨먹지 않아 간식으로 먹으라고 아내를 위해 매일 미숫가루를 탓다. 덕분에 차츰 아내의 표정도 밝아지는 듯해서 호전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얼마 전 둘째 아이 돌 사진을 찍고 사진을 찾아 왔는데, 아내와 나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내의 양쪽 눈이 짝짝이가 되어 있었다. 왼쪽 눈이 눈에 띌 정도로 밑으로 처져 있었던 것이었다. 매일 볼 때는 몰랐는데 사진으로 보니 확연하게 드러났다. 무엇보다 아내의 증상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못한 내 탓이 컸다.

아무래도 침을 맞아야 할 것 같아 그 다음날 서둘러 한의원을 찾았다. 한의원에서는 기력이 약해서 그렇다며 침과 뜸, 그리고 보약을 권했다. 퇴근 후 아이들을 찾아오는 일은 내가 했다. 대신 아내는 한의원에 들러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는 갑자기 뒷골까지 당긴다고 한다. 덜컥 겁이 난다.


늦기 전에 빨리 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에 들러 사골과 도가니를 샀다. 어떻게 끊이는지 몰라 아내의 친구에게 물었다.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저녁 무렵 아내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골을 제대로 끓이고 있는지 걱정되어 전화했다고 한다. 나는 아내의 친구에게 궁금한 점을 다시 물었다.

아내의 친구는 내가 딱하게 보였나 보다. 나는 오히려 아내가 딱하구만…. 아내의 친구는 '시간이 늦었으니 일단 찬물에 사골을 3시간 정도 넣고 피를 우려낸 다음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끊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줬다.

아침에 아내가 사골을 먹을 수 있도록 하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혹시나 늦잠을 잘까봐 몇 번씩 잠에서 깨었다. 새벽 5시,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이 무거웠다. 냉장고에서 사골을 꺼내 끊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끊이다가 첫 번째 거른 사골국물을 버렸다.

그리고 '제발 이거 먹고 병이 호전되기를' 고대하며 사골을 끊이기 시작했다. 냄새가 진동을 한다. 혹시나 아내와 아이들이 깨지 않을까 뚜껑을 덮을 때도 조심스럽다. 아내가 일어날 즈음, 사골이 제법 뽀얀 물을 우려내며 잘도 익어간다.

아내가 언제부터 끊였냐고 묻는다. 나는 아직 좀더 끊여야 된다고 말했다. 아내가 뚜껑을 열어 본 뒤 초췌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불쑥 한마디한다.

"당신 나 만나서 고생하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아내에게 하고픈 말이다. 나는 대답 대신 빨리 출근해야 한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있다가는 눈물을 보일 것 같았다. 자식 둘과 못난 남편 뒷바라지에 직장까지 다니다가 정작 본인의 건강을 챙기지 못한 아내, 비록 미약하지만 사골국물처럼 아내의 나쁜 기운이 이번에 뽀∼옥 빠졌으면, 정말 정말 좋겠다. 출근하면서 왠지 머쓱해 현관에 나온 아내에게 한마디했다.

"미안타, 내 앞으로는 니한테 잘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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