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문화예술관박도
선양의 밤
저녁 7시, 빈관 부근 반점에서 저녁을 먹고, 이 선생과 다시 거리 산책을 나섰다. 중국 요리에 입안이 느끼해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던 참에 마침‘아리랑 커피 하우스’란 간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주인도 종업원도 모두 조선족으로 ‘어서 오세요’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종업원이 건네준 서울의 신문들을 훑었다.
이틀 지난 신문으로 일주일치를 갖다 주었다. 온통 수해 피해와 대선 자금, 세풍, 북풍 기사로 짜증만 났다.
빈관으로 돌아가 일찍 잠을 청하기에는 객수가 발동했다. 이 선생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왔다. 누군가 앞길을 막았다.
“선생님들, 남조선에서 오셨어요?”15세 가량의 깡마른 소년이었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저는 북조선에서 온 꽃제비예요.”
“꽃제비?”나는 의아스럽게 반문했다.
“북조선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도망 나왔어요. 도와주세요.”소년의 눈빛이 너무나 애잔했다. 나도 이 선생도 호주머니를 뒤져 몇 푼 손에 쥐어주었다.
“고맙습네다. 안녕히 가시라요.”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꼭 뭔가 홀린 기분이었다. 나는 그 소년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고 믿고 싶었다.
세상에 제일 큰 설움이 배고픈 설움이라는데, 오죽하면 강을 건너고 국경을 넘어와 남의 나라에서 비렁뱅이 생활을 할까. 한참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에 다닐 나이에 생계를 위하여 거리를 헤매다니…. 그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조선족문화예술관’이란 간판이 달린 건물이 보여 무슨 볼거리라도 있을까 들어가 보았다. 이국에서 우리 고유의 장고 춤이나 가야금 연주라도 감상할지 모른다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달리 무도회장이었다.
조명이 거의 없다시피 한 무도장에는 남녀가 껴안고 돌고 있었다. 후줄근한 열기와 중국인 특유의 체취와 땀 냄새, 거기다 앞도 가릴 수 없는 깜깜한 분위기였다.
시계 제로의 무도장에서는 남녀들이 춤이라기보다는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의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간의 열정은 동서 고금도 때와 장소도 없는 모양이다.
하긴 이런 사랑의 열정으로 인류가 존속되고 문화가 발전할 테지. 나는 그들이 연출한 애로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픈 호기심도 있었지만, 실내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섬뜩함을 줘서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중국에서 마지막 밤, 조촐한 술집이 있으면 한 잔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음산한 밤 분위기에 그만 잔뜩 겁이 났다. 그래서 더 이상 헤매지 않고 곧장 일찍 빈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불을 끄고 막 잠이 들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옆 침대의 이 선생이 받았다.
“필요 없습니다.”이 선생이 무 자르듯 딱 자르고는 얼른 수화기를 놓았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매춘이 없다더니 그게 아니군요.”
“태초부터 있었다는 그 직업이 국가의 공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