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눈이 어두워 동지애도 점차 멀어지다

항일유적답사기 (52) - 선양(Ⅲ)

등록 2003.07.08 09:15수정 2003.07.08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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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문화예술관
조선족 문화예술관박도
선양의 밤

저녁 7시, 빈관 부근 반점에서 저녁을 먹고, 이 선생과 다시 거리 산책을 나섰다. 중국 요리에 입안이 느끼해서 커피 한 잔이 생각나던 참에 마침‘아리랑 커피 하우스’란 간판이 눈에 띄어 들어갔다.


주인도 종업원도 모두 조선족으로 ‘어서 오세요’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종업원이 건네준 서울의 신문들을 훑었다.

이틀 지난 신문으로 일주일치를 갖다 주었다. 온통 수해 피해와 대선 자금, 세풍, 북풍 기사로 짜증만 났다.

빈관으로 돌아가 일찍 잠을 청하기에는 객수가 발동했다. 이 선생과 함께 다시 거리로 나왔다. 누군가 앞길을 막았다.

“선생님들, 남조선에서 오셨어요?”15세 가량의 깡마른 소년이었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저는 북조선에서 온 꽃제비예요.”
“꽃제비?”나는 의아스럽게 반문했다.


“북조선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도망 나왔어요. 도와주세요.”소년의 눈빛이 너무나 애잔했다. 나도 이 선생도 호주머니를 뒤져 몇 푼 손에 쥐어주었다.

“고맙습네다. 안녕히 가시라요.”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꼭 뭔가 홀린 기분이었다. 나는 그 소년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고 믿고 싶었다.


세상에 제일 큰 설움이 배고픈 설움이라는데, 오죽하면 강을 건너고 국경을 넘어와 남의 나라에서 비렁뱅이 생활을 할까. 한참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학교에 다닐 나이에 생계를 위하여 거리를 헤매다니…. 그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조선족문화예술관’이란 간판이 달린 건물이 보여 무슨 볼거리라도 있을까 들어가 보았다. 이국에서 우리 고유의 장고 춤이나 가야금 연주라도 감상할지 모른다는 내 기대와는 전혀 달리 무도회장이었다.

조명이 거의 없다시피 한 무도장에는 남녀가 껴안고 돌고 있었다. 후줄근한 열기와 중국인 특유의 체취와 땀 냄새, 거기다 앞도 가릴 수 없는 깜깜한 분위기였다.

시계 제로의 무도장에서는 남녀들이 춤이라기보다는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의 행위를 즐기고 있었다. 남녀간의 열정은 동서 고금도 때와 장소도 없는 모양이다.

하긴 이런 사랑의 열정으로 인류가 존속되고 문화가 발전할 테지. 나는 그들이 연출한 애로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픈 호기심도 있었지만, 실내 분위기가 너무 어둡고 섬뜩함을 줘서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중국에서 마지막 밤, 조촐한 술집이 있으면 한 잔 하려고 했는데, 무언가 음산한 밤 분위기에 그만 잔뜩 겁이 났다. 그래서 더 이상 헤매지 않고 곧장 일찍 빈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불을 끄고 막 잠이 들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옆 침대의 이 선생이 받았다.

“필요 없습니다.”이 선생이 무 자르듯 딱 자르고는 얼른 수화기를 놓았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매춘이 없다더니 그게 아니군요.”
“태초부터 있었다는 그 직업이 국가의 공권력으로도 막을 수 없나 보죠.”

서탑교회
서탑교회박도
선양의 아침

1999년 8월 11일 수.

4시에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보니 어제와는 딴판으로 하늘이 말갛고 별들이 초롱초롱하다. 세면을 마치고 짐을 꾸린 후, 5시에 혼자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왔다.

비가 온 다음날 아침인 탓인지 아주 상큼한 아침이었다. 선양의 청소부는 밤새 더럽혀진 거리를 깨끗이 쓸고 있었다.

선양의 아침은 생동감이 넘쳤다. 자전거의 물결이 온통 거리를 메웠다. 하나같이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오가고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니 찬거리를 사가는 사람은 여자만 아니라 남자들도 꽤 많았다.

중국에서는 부엌 일은 남자가 더 많이 한다는데 시장 보는 일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었다.

큰 건물 계단이나 처마 밑에는 그때까지 볼 박스 같은 골판지나 널빤지를 깔고 자는 사람이 숱하게 많았다. 여기도 노숙자가 많은 모양이었다.‘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더니,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완전 고용과 노숙자 일소는 불가능하나 보다.

빈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예스럽고 몹시 낡은 서탑교회가 있어 카메라에 담았다. 이 교회는 우리 동포들이 남만주 이주 초기에 세웠다고 김 선생이 일러주었다.

고색 창연한 옛 건물 옆에 현대식 5층 빌딩의 새 교회가 들어섰고, 이 건물은 역사물로 남겨두면서 지금은 컴퓨터학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8시, 선양공항에서 베이징행 북방항공기에 올랐다. 기내의 무료함 탓인지 옆자리에 앉은 김 선생은 종조부 김동만(金東滿, 본명 金鑽植,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선생의 일화를 얘기했다.

김동만 선생은 김동삼 선생의 친아우로서 1911년에 형을 따라 만주로 와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동만 선생은 경신참변 때 삼광중학교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몰두하다가 일제 토벌대가 덮쳐 동지 6명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일제 토벌대는 동만 선생의 목을 작두로 잘라 동네 들머리에다 걸어두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토벌대가 물러간 후,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삼원포 뒷산에다 묻었다. 뒷날 시신을 쉬 분간할 수 있게 유리병에다 이름을 써서 넣어 두었다.

1991년 국가보훈처에서 해외 선열 유해 봉환 사업으로 김동만 선생이 그 대상자로 선정되어 선생의 유해를 찾고자 김 선생은 그곳에 사는 옛날부터 알고 지냈던 조선족에게 부탁을 했다.

선양의 번화가,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러시아 풍이었다.
선양의 번화가,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러시아 풍이었다.박도
그 얼마 후 연락이 온 바, 중국인 포수가 사냥하러 가다가 찾았는데 유해 값으로 1만 달러를 요구한다고 했다.

김 선생은 애초 부탁할 때 다소의 수고비를 주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엄청난 돈을 요구해서 난감했다. 국가보훈처에서 유해 봉환 사업을 해 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그 돈까지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 선생이 그에게 “중국인 포수가 누구냐?”고 당신이 직접 만나 담판을 짓겠다고 했더니, 그제야 그는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 자작극을 했다고 고개를 푹 숙이더라는 것이었다.

김 선생은 그에게 다소의 수고비를 주고 동만 선생의 유해를 모셔와서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는 얘기였다.

이제는 세월 탓인지 만주 땅에도 지난날 항일투쟁 시절 두터웠던 동지애도 옛 정리도 점차 없어지고 대부분 돈에 눈이 멀어진 것 같다고 김 선생은 씁쓸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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