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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문학의 실체 위에서
1982년 등단 이후 줄곧 고향을 떠나지 않고 고향 지키기를 해온 처지에서, 그리고 개인 작품활동에 주력하지 않고 지역에서 문학 공동체를 만들고 이끌며 동고동락을 해온 처지에서 '지역문학의 미래와 발전 방향'에 관해 고장의 여러 문학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1960년대 후반 단기간에 그쳤던 <여울문학동인회> 활동은 제쳐놓더라도, 지역문학에 관한 한 20년 이상의 실체험적 차원에서 '증인'의 위치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1981년 <흙빛문학회>를 만들어서 1994년까지 13년 동안 몸담았고, 1993년 <충남소설가협회>를 창립해서 만 10년째 회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8년 <태안문학회>를 창립해서 회장으로 혼신의 열과 성을 다하며 지난 6월 29일 바로 이 자리에서 창립 5돌과 <태안문학> 제10집 발간을 기념하는 큰 행사를 치른 바가 있습니다.
비록 고생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긴 했지만, 지역사회에 또 한번 정신문화의 기운과 기풍을 매우 역동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발현시킬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우리 지역문인들에게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하는 일 외로 대외적이고 행동적인 행사도 중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문인들에게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확실한 자기 확인 방법이지만, 우리 경우처럼 지역사회가 바로 존립 기반인 상황에서는 문학 행사라는 이름의 행동 병행 역시 필요하고도 중요한 우리의 존재 증명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물론 일차적으로는 글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각자의 메시지를 한데 모아 실어 나르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책이 좀더 효과적으로 전파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야 하고,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출되는 대외적인 행사들일 것입니다.
글을 쓰는 일, 책을 만드는 일, 행사를 준비하고 치르는 그 모든 일들에서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 그 적극적인 행동 양식이야말로 우리 지역문인들에게 부과되어 있는 지역에서의 시대적 문화적 소명일 것입니다.
2, 지역문인이라는 용어의 뜻, 지역문인의 실체와 위상
저는 위에서 '지역문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이 지역문인이라는 용어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 지역문인이라는 용어를 굳이 '전국문인', 즉 전국적인 명성이나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문인의 상대적 개념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 지역문인이라는 용어의 뜻을 전국문인의 상대적 개념으로 인식한 나머지 축소 지향적이고 자해적인 관점으로 용어 사용을 하는 경우도 보았습니다만, 그것은 유아적이고 패배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지역문인은 결코 어느 지역만을 활동 무대로 삼고 그 지역에서만 문인 행세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느 지역에서 살고 있으면 그는 자동적으로 지역문인이 됩니다. 지역문인은 일차적으로 '지역에서 살고 있는 문인'이라는 뜻으로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지역문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지역에서 살고 있으면서 그 지역의 정신문화 운동에 동참하고 헌신하는 사람일 때 그는 지역문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자신만의 밀실에서 개인적인 작품 활동에만 주력하는 사람은 지역문인일 수 없습니다. '적극적이고 행동적인 방식으로 지역 정신문화의 중심이고 견인차인 지역문학, 문학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역작가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또 그런 사람들을 지역작가라고 불러야 합니다.
지역작가, 지역문인이라는 말에는 이처럼 숭고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문인이라는 용어에서, 그리고 우리가 지역문인이라는 사실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그 자부심 만큼 지역에 대한, 문학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3. 정신문화의 견인차 문학
문학은 정신문화의 중심이고 견인차라는 표현을 앞에서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문학의 핵심적이고도 포괄적인 뜻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문학은 예술의 한 영역이면서 동시에 모든 학문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언어와 문자를 매개로 한다는 것 자체가 학문적 의미를 구성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이라고 하면 학문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학문의 발달과 더불어 점차 의미가 한정되어 자연과학이나 정치·경제·법률 등과 같은 학문 이외의 학문, 즉 순문학·철학·역사학·사회학·언어학 등을 총칭하는 언어로도 쓰이다가 오늘날에는 단순히 순문학만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지요.
그러나 오랫동안 문학이라는 말이 지녀온 그 포괄적인 것들은 문학이 곧 모든 학문의 모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학의 발달로부터 모든 학문의 가지치기와 체계의 세밀성이 이룩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어느 학문도 문학의 요소인 언어의 정밀성과 표현술을 빌지 않고서는 그 본령이나 심연의 세계를 제대로 발양해 낼 수가 없습니다.
문학은 인간의 최초 기본적 표현인 '말'을 매개로 하는 언어 예술입니다. 말은 인간의 정신을 반영합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바 '언어는 정신의 집'입니다. 인간의 정신 자체인 말을 다루는 언어 예술인만큼 문학은 '정신 문화의 총화'라는 말로도 정의됩니다. 정신의 깊이와 뜻을 지닌 말의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말입니다. 말의 미학적 예술성은 짧은 한 줄의 시로도 가능하고 대하소설로도 성취됩니다. 모든 학문의 총체적 집합체의 모습을 하기도 하는 문학은 그러나 다양하면서도 정교한 감동적 예술성이 기본적 생명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문학은 개인이나 공동체 삶의 적나라한 모습을 반영합니다. 한 시대를 철저히 해부하고 기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림자에 가려진 이면의 세계들이 지닌 의미를 투시하며, 삶의 구도적 가치를 제시하기도 하는 문학은 그러므로 인류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과 삶에 큰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사람의 시청각을 좌우하는 전파 매체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 '문학의 죽음'이 예고되기도 합니다. 많은 문인들이 '문학의 위기'를 느끼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문학 고유의 생명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인간은 '사고(思考)'하는 동물이입니다. 감각만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사고를 자극하고 탄력적이고 깊이 있는 사유의 세계를 안겨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문학입니다. 전파 매체의 폐단이나 위험을 자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문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활로를 찾으면서 생명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문학에 대한 애정, 정신문화에 대한 사명감을 일깨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부단히 활기차게 이어가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연단이 필요합니다. 깊이 있는 공부와 사고를 거듭하면서 시대정신을 열어갈 수 있는 발전적인 가치관의 수립과 확충에 끊임없이 공을 들여야 합니다. 그 노력을 절대로 무식해서는 안됩니다.
몇 년 전에 지방 예술인 단체의 높은 위치에 있는 한 미술인을 만났습니다. 그는 종(鍾)을 많이 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종 그림을 볼 적마다 나는 그 세밀함과 정교함에 감탄을 하곤 했습니다. 그가 종 그림에 그토록 천착하는 것은, 그 그림으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려는 의도일 거라고 이해했습니다. 그 종 그림에 담겨 있을 그의 메시지와 그 종 그림에 담겨 있는 음(音)의 미학이 마냥 신선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방선거 국면에서 그로부터 "충청도 사람으로서 충청도의 자존심을 위해 자민련을 찍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실망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그토록 유치하고 천박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그림을 다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1989년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방북 사건' 때의 일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서 몹시 흥분하는 한 문인을 보았습니다. 그는 특히 임수경 학생에게 "어린 계집애가 뭘 안다고…"하면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방북을 비난하는 좀더 확실하고 구체적인 이유를 묻는 내게, "저것들 땜에 내가 증권 손해를 봤단 말야!"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그 순간부터 적어도 나에게만은 이미 문인이 아니었습니다.
문인에게는 고도의 정치의식·사회의식·역사의식이 결합된 시대정신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런 고도의 가치관을 위해서는 실로 많은 독서와 사고가 필요합니다. 유식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차고 넘치는 시대를 사는 문인으로서 자신의 글에 확실한 메시지를 담고, 그 메시지에 스스로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절대로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런 탐구적인 자세만이 온전한 작가정신과 심도 있는 철학의 세계와 품성을 그에게 안겨 줄 수 있을 것입니다.
4. 지역에 대한 사명감, 향토애에 대한 확신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사는 자리에 대한 애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의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표현 양태를 일러 우리는 향토애라고 부릅니다. 우리 지역문인에게는 이 향토애가 더욱 필요합니다. 뜨거운 향토애로부터 발현되는 갖가지 형태의 로컬리즘은 우리 지역문학의 가장 큰 자산이고 책무이기도 할 것입니다.
향토애야말로 우리를 좀더 지역문인답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앞장에서 말한 정신문화의 견인차인 문학에 대한 애정이 양질의 향토애와 잘 결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지역정신문화의 꽃, 지역문학의 꽃을 더욱 적극적으로 소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역문인들에게는 그 지역의 특성, 역사, 지리, 자연환경, 풍물 등에 대한 천착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거기에 더해 당대 고장의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관심과 이해를 가지게 되면 지역문인의 책무는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실 무궁무진한 소재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며 살고 있는 우리 고장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갖가지 사안들을 내 작품에 담으려는 노력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지역의 과거와 현재의 갖가지 사안들을 소재나 배경으로 하여 좋은 작품들을 생산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한국문학의 탁월한 수확이 되고, 그 지역성이야말로 세계화의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우리의 정서와 의식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해 있는 향토애를 우리의 작품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작품을 통해 지방색을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체현해 내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지역문학의 존재 이유를 좀더 명확히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5. 지역문학의 방향, 바람직한 행동 양식
이런 관점에서 1998년에 생명운동을 시작한 우리 <태안문학회>의 '고고(呱呱)의 성(聲)'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안문학> 창간호의 머릿글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일러 '변방의 봉홧불'이라고 했습니다. 「변방의 봉화로부터 저항은 시작되었고, 또 남았다」라는 머릿글의 제목은 우리의 존재 이유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제시해 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계속 변방의 봉홧불로 존재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변방이었던 곳에서 우리는 오늘 문화의 변방 지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그것을 다행스러워해야 합니다. '변방의식'을 확실한 자부심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변방은 중앙을 지켜주는 것이어야 하고, 중앙이 궤멸되고 무너지더라도 끝까지 남아 버티는 곳,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변방으로서의 가치가 온전할 수 있습니다.
첨예한 감수성으로 맨 처음 봉홧불을 피워 올렸던 변방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변방의 감수성과 통찰력을 우리는 이제 문화의식으로 되살리고 생명처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각오로 계속적으로 문화의 봉홧불을 피워 올려야 합니다. 봉홧불이 있음으로써 그 변방은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가 오늘 이 변방에서 피워 올리고 있는 문화의 봉홧불은 바로 지역문학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가 온몸으로 껴안고 가고 있는 지역문학이 좀더 확실한 문화의 봉홧불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좀더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무장해야 하고, 더욱 뜨겁게 향토애를 지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안고 가는 지역문학, 문화의 봉홧불은 결코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른 고장의 봉홧불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봉화의 목적과 사명을 다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지역과의 교류와 연대가 필요합니다. 여러 지역의 문학 단체들이 정보 교환과 작품 교류를 실현하면서 행동을 같이하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역문학의 내실을 다시고 방향 설정을 확실히 하기 위한 세미나와 토론회 같은 것을 공동으로 마련해 보는 것도 하나의 확실한 발전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변방을 지키는, 그리하여 온 나라를 지키는 문화의 봉홧불이라는 자부심을 지녀야 합니다.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피워 올리는 문화의 봉홧불은 우선 수많은 지역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져야 하고, 다른 지역으로 릴레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봉홧불일 수 있습니다. 그 릴레이를 위해, 원활하고 확실한 전파를 위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쓰고 공부하며,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명감을 불태워야 합니다. 그리고 바쁜 사생활 속에서도 선의의 온갖 방법들을 찾고 개발하고 행동으로 실체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역문학의 가치를 인식하고 사랑하면서 열정으로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봉홧불 의식, 그것이 참으로 필요함을 오늘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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