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경고장을 받은 혈면귀수는 사색이 되어버렸다.
산해관 무천장주라는 자리를 어떻게 해서 얻었던가!
엄청난 은자를 뇌물로 바치고야 얻은 그 자리를 본전도 뽑기 전에 잃는 것은 물론 치도곤을 당할 수 있기에 벌벌 떤 것이다.
식겁한 그는 모든 정의수호대원들과 각 점포에서 차출한 장정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전(前)과 동(同)이었다.
산세의 교묘함과 산 속에서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산적들의 치고 빠지는 작전에 실컷 농락만 당하고 돌아왔다.
그 사이 협도당은 무려 열두 차례나 출몰하면서 엄청난 재물을 훔쳐갔다. 이런 것을 내우외환(內憂外患), 칠전팔도(七顚八倒),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할 것이다.
산해관 무천장은 변방에 위치해 있어 다른 무천장과 달리 총단으로 은자를 보내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누리고 있는 몇 안 되는 무천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렇기에 전임 무천장주인 사면호협이 빈촌 사람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은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혈면귀수는 그럴 은자를 모두 착복하였기에 빈촌의 인심이 돌아섰던 것이다. 아무튼 협도당의 집중적인 출현이 있은 직후 혈면귀수는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생겼다.
그는 일년에 두 번 무림천자성 장로와 호법 등 수뇌부들에게 뇌물을 보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안 보내자니 홍삼을 강탈당한 건도 있고 하여 앞일이 걱정되었고, 보내자니 이제 겨우 본전을 찾았나 싶었는데 또 다시 그걸 채울 일이 까마득하다 느껴졌다.
혈면귀수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가히 화수분이라 불러도 좋을 무천장주라는 자리를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화수분은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데 옛날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의 일이다. 회를 개려면 굉장히 많은 물을 써야 하는데, 일일이 길어다 쓸 수가 없어 높은 봉우리 위에 구리로 큰 동이를 하나 만들어 놓고 군사 십만 명을 풀어 날마다 황하(黃河)의 물을 길어 그 동이에 채우게 하였다.
각 공사장에서 쓰는 물은 그 동이에서 끌어다 썼는데 워낙 많은 군사들이 길어다 채우는 물이라 써도 써도 바닥 드러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하수(黃河水)를 길어다 붓는 분(盆 ;동이 분)이라 하여 하수분(河水盆)이라 하던 것인데, 이것이 와전되어 화수분이 된 것이다.
화수분과 비슷한 뜻으로 무진장(無盡藏)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불교에서는 덕이 광대하여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남북조 시대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는 무진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는 신자들이 희사한 보시금을 자본금으로 하여 서민들에게 낮은 이자로 은자를 대출해주는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워낙 준비된 은자가 많았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빌려주고도 남은 것에서 유래하여 많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듯 무천장주라는 자리는 막대한 은자를 벌어들일 수 있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모아두었던 은자 가운데 거금 이십만 냥이나 헐어내는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자리를 지키려한 것이다.
혈면귀수는 명색이 무천장의 장주이다보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였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쓰렸다. 이런 판국에 산해기원에서 막대한 은자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몹시 화가 났다.
제것은 제것이고, 남의 것도 제것이라는 심보를 지니고 있었으니 산해기원에서 잃어버렸다는 삼십팔만육천 냥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강탈당한 기분이 든 것이다.
이날 산해기원의 원주는 참수형에 처해지는 횡액을 당해 한 많은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덕분에 그가 감춰두었던 십팔만 냥에 달하는 은자는 오십 년이 흐른 후에나 발견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아들과 손자는 물론 증손자까지 그야말로 문전걸식(門前乞食)하다시피 하여야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고손자 대에서는 떵떵거리고 잘 살게 되었다.
아무튼 산해기원 원주의 목이 동체에서 분리되던 순간 산해관에서 십오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중현(綏中縣)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곳은 오랜 기근으로 인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근근히 명을 이어오던 그야말로 빈촌 가운데 빈촌이었다. 그런 그곳으로 수십여 대의 마차가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선두에 있는 마차에는 진한 묵향을 풍기는 것만 같은 매화 한 송이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협도당에서 굶주린 양민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남녀가 있었다. 그들의 뒤에 있던 네 장한들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얻어 만족한다는 미소라기보다는 뭔가에 몹시 흡족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미소였다.
선두의 남녀는 바로 대흥안령산맥의 모든 산적들을 일통한 뒤 새로 정의문(正義門)을 세운 일지매(一枝梅) 여옥혜와 총관인 역발산(力拔山) 왕구명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 있는 장한들은 맹호당주인 탑탁호골 좌비직과 혈우당, 육손당, 그리고 광견당 당주들이었다.
야트막한 야산의 정상에 올라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일지매 여옥혜의 옥용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있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취록색 경장을 걸친 그녀의 등에는 푸른 수실이 달린 장검이 달려 있었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하여 한 눈에 보기에도 결코 예사롭지 않은 그것은 청룡무관의 가전지보(家傳之寶)인 청룡검(靑龍劍)이 분명하였다.
그녀의 오른 편에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있는 역발산 왕구명의 손에는 한 눈에 보기에도 묵직한 묵부(墨斧)가 들려있었다. 나무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보통 도끼의 무게는 길이가 대략 세 치 정도 되고, 날의 너비는 한 치 반 정도이다.
그런데 왕구명이 들고 있는 도끼는 몸체의 길이만 두 자 가량 되고, 날의 너비 역시 두 자 가량 되는 어마어마한 놈이었다.
게다가 길이가 거의 다섯 자 정도 되는 손잡이 역시 시커먼 철로 되어 있다. 이 정도면 보통 도끼보다 적어도 삼십여 배는 더 무거운 엄청난 중병(重兵)인 셈이다.
왕구명이 애지중지하던 청룡검을 버리고 듣도 보도 못하던 도끼를 들고 있는 것은 희대의 기연(奇緣)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스듬한 경사에 초지(草地)로 뒤덮여 있는 대흥안령산맥 중에는 울창한 수림으로 이루어진 곳도 있다.
뿐만 아니라 온통 바위투성이인 곳도 있다.
청룡무관에 있던 왕구명은 홀연히 사라졌던 여옥혜가 보낸 한 통의 서찰을 받고는 헐레벌떡 대흥안령산맥으로 향했었다.
아무리 여중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보타신니의 검법을 익혔다 하더라도 산적들로 들끓는 곳에 있다간 무슨 변이라도 당할까 싶어 달려나온 것이다. 그가 보기엔 절묘한 검법을 지닌 여옥혜도 일개 연약한 여인으로만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대흥안령산맥에 접어든 그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광활한 산맥 어디에 그녀가 있는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투성이인 산등성이인지라 반나절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고, 그늘 한 점 없어 온통 땀 투성이인 데다가 몹시 지친 상태였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할 즈음 갑자기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는데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퍼부었다.
이 정도면 제아무리 고수라 할지라도 몸을 피하는 것이 상례인 법. 왕구명 역시 비를 피하기 위하여 인근 바위를 더듬다가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쏟아지는 흙탕물을 피해 허겁지겁 하던 중 운 좋게도 오래된 동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비교적 저지대인지라 연신 흙탕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뇌성벽력이 진동하는 밖으로 나갈 수 없던 그는 폭포수처럼 흘러드는 흙탕물을 피해 제법 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던 중 흙 속에 박힌 철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찌나 오래 되었는지 손을 대기 만해도 부서지는 그것의 안에는 놀랍게도 조금의 녹도 슬어있지 않은 철부(鐵斧)가 담겨 있었다. 그것인 바로 지금 왕구명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고, 정확한 명칭은 파천부(破天斧)라고 한다.
이 파천부와 함께 있던 옥합(玉盒)에는 이상한 문자가 잔뜩 새겨진 거북이 등껍질이 들어 있었다. 한 눈에 갑골문(甲骨文)임을 알아본 왕구명은 그것을 해독해 보았다.
처음 보타암에 당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하도 심심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그의 손에 닿은 것이 바로 갑골문 해독에 대한 서책이었기에 뜻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늘을 부수는 도끼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을 지닌 그것은 상고시대 때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隕石)의 잔재물로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만든 사람은 치우(蚩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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