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광주는 내 청춘 모두를 뺏어갔다"

[인터뷰] <마흔에 길을 나서다>를 묶어낸 소설가 공선옥

등록 2003.07.09 18:14수정 2003.07.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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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식
모든 것은 80년 광주에서 시작됐고, 동시에 끝났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다. 아버지는 아내와 세 딸의 '밥'을 위해 평생을 떠돌이 막일꾼으로 세상을 헤매 다녔다. 일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전라도 목포건, 경상도 부산이건, 충청도 어느 도시건 상관하지 않고 헐값에 자신의 노동을 팔았다.


너나 없이 가난했던 1960년대. 가진 거라곤 몸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정은 누구나 비슷했다. 그 아버지는 황석영의 소설 <삼포 가는 길>에 등장하는, 싸구려 식당에서 멀건 국에 식은 밥을 말아 삼키고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영달과 정씨에 다름 아니었다. 매일 같이 일하면서도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역설의 삶.

아버지가 벌어다주는 돈으론 짜디짠 자반고등어 한 마리 구워먹을 형편이 안됐기에 딸들은 그 동네 계집아이들이 통상 그런 것처럼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면 식모나 여공이 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극한의 가난 속에서 갯가의 지렁이를 캐내다 멀건 죽을 쑤어 먹여 키운 딸들은 기특하게도 공부를 잘 했다.

중학교 졸업 후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려던 그 아버지의 둘째 딸. 하지만, 선생 하나가 극구 말렸다. "여기서 주저앉히기엔 가진 재주가 아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선생의 설득과 도움으로 입학한 고등학교. 열 일곱 소녀는 고향인 전남 곡성을 떠나 광주를 향했다.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 못한 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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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풀을 먹여 빳빳이 다린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던 광주에서의 행복은 너무도 짧았다. 소녀는 1980년 5월 광주의 학살을 바로 코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따뜻한 늦봄 햇살이 눈부셨던 그날.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공수부대의 곤봉에 맞고 대검에 찔려 쓰러지던 사람들. 비명은 대로를 맴돌았고, 피는 아스팔트 위로 강을 이루었다.

장님이 아니면 볼 수밖에 도리 없던 학살의 현장. 도시 곳곳에선 콩볶듯 연일 총소리가 들려왔고, 제 또래 여고생이 헌혈을 하고 나오다 진압군의 조준사격에 머리통이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흉흉한 소문이 되어 떠돌았다. '80년 광주'는 열 여덟 어린 여고생을 견딜 수 없는 공황에 빠뜨렸다. 정신과 육체는 동시에 황무지가 됐다. 그리고, 소녀의 기억은 거기에서 끊겨있다.


이게 누구의 이야기냐고? 소설가 공선옥(40)의 청소년기의 이야기다. 그는 말한다. "아직도 그날 내가 본 것이 현실이었는지 의심스럽다"고. "분명 죽는 사람을 봤는데 죽인 사람은 왜 없냐고"고.

23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열 여덟 철없던 여고생은 아이 셋을 둔 아줌마가 됐지만 광주는 여전히 공선옥에게 선지피를 흘리는 지울 수 없는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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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반공이 쇠를 깎고,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듯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노동자"

"소설가? 그냥 어쩌다 보니 됐다"
"소설가? 그냥 어쩌다 보니 됐다"홍성식
82년 대학에 입학한 공선옥. 하지만, 공부만 열심히 하는 건 당시 광주의 학생들에게 수치인 동시에 사치였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하루에도 몇 번씩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리던 시절. 매일매일이 집회였고, 하루하루가 싸움의 연속이었다. 화염병을 만들고, 깨진 보도블록을 시위대에게 날랐다.

가세는 더 기울었고, 학교도 중도에 그만 뒀다. 공장 노동자와 관광버스 안내양으로 살았던 20대 중반. 하지만, 그 시절을 추억하는 공선옥의 목소리는 의외로 밝았다.

"시골 중년부부들에게 온천으로의 관광은 하나의 축제였어. 돼지를 잡고, 버스에 술을 박스 채 실었지. 남자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은 고운 빛깔의 한복을 차려입고... 안내양 노래교본에 나와있는 곡들을 흥얼거리면 너나 없이 좁은 차 복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왜 그리 우습고도 가슴 짠하던지."

스물 네 살에는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 결혼은 행복하지도 오래 가지도 못했다. 이혼에 이어진 또 한번의 결혼. 하지만 재혼생활 역시 오래지 않아 파경을 맞았다. 바람대로 돼주지 않았던 2번의 결혼. 그리고 남겨진 3명의 아이들. 묘하게도 공선옥과 함께 살았던 두 사내는 모두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왜 소설가가 됐느냐"는 질문에 공선옥은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라고 답했다. 정말 그럴까? 채 서른이 되기 전에 그토록 많은 사연을 겪었으니, 어쩌면 그 사연들이 기구한 팔자의 한 여인을 이야기꾼에 다름 아닌 소설가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규정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91년 등단작 '씨앗불'에서부터 첫 작품집 <피어라 수선화>를 거쳐 올해 초 출간된 <붉은 포대기>까지 공선옥이 낸 10여권의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5월 광주'와 '억압받는 여성'이라고 잘라 말한다. 하지만, 공선옥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읽는 사람이 판단할 문제지 평론가나 기자들이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니잖아. 나 역시 그런 강박관념에서 쓴 것도 아니고. 소설이 거창한 철학이나 이념을 담아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질려. 소설은 그저 세상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쓰는 것 아냐?

선반공이 쇠를 깎고, 제화공이 구두를 만들고, 제과공이 빵을 굽듯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노동자일 뿐이야. 거기에 무슨 철학이나 이념이 필요하고, 의미심장한 뜻을 담아내는 게 중요하겠어. 내 소설쓰기는 자식들과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작가는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정말로 밥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공선옥의 소설에선 그의 아버지와 자신, 자기의 자식에 다름 아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끈끈한 연민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가없는 애정이 뭉턱뭉턱 묻어 나온다. 이는 모진 세상을 억척같이 살아본 이가 아니면 생산해낼 수 없는 언어.

공선옥이 춘천으로 온 이유는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본 '전세값에 제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플래카드를 본 때문이었다. 주저 없이 아이 셋을 데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로 떠날 수 있는 용기. 거기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이를 두고 공선옥은 "닥치면 다 살아내게 돼있다"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기자는 그 무덤덤함이 무서웠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제 삶과 자기에게 몸을 기댄 아이들까지 부둥켜안으며 거친 세파를 헤쳐나갈 용기 있는 사람이 쓴 소설이라면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진정한 용기'를 말할 수 있을 터. 공선옥에게 세상은 여자라고 봐주지 않은 피비린내 풍기는 싸움터고, 소설은 그 싸움터에서 도태하지 않으려 힘주어 잡은 무기가 아닐지.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 작지만 단단한 어깨

최근 출간된 공선옥의 기행산문집 <마흔에 길을 나서다>는 관광지와 교통편, 맛집만을 소개하는 식상한 여행안내서와는 전혀 다른 생경함으로 월간 <말>에 연재될 때부터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꼬박 1년을 '집'이 아닌 '길'에서 살았다. 그 길 위에서 보따리를 머리에 인 행상 할머니를 만났고, 분신한 노동자를 만났으며, 미군탱크에 깔려죽은 중학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또 무엇을 만났을까?

친절한 답변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상하면서도 "누가 가장 기억에 남고, 어떤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가"라고 내처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은 걸작이다.

"모두 다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길을 떠나있는 동안 새끼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먹이를 준비했던 기억은 더 잊혀지지 않는다."

소설가 공선옥.
소설가 공선옥.홍성식
구구절절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부연에 부연을 거듭하는 세태에 '책 내용은 책을 읽어보면 알 것이지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고 소리 없이 웅변하는 그의 당당함 앞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니,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바로 그때. 고등학교에 다니는 누나가 돌봐주고 있는데도 "엄마가 보고싶다"며 훌쩍이는 일곱 살 막내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 어리광을 자르며 "무언가를 하러 나왔으면 그걸 다 해야 집에 갈 수 있는 거다. 너도 그걸 알아야한다"라고 말하는 공선옥의 태도가 단호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들 몫으로 따로 챙겨둔 왕만두를 취중임에도 잊지 않았다.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을 만두를 검은색 비닐봉투에 담아 든 공선옥이 서둘러 작별인사를 고했다. 돌아선 그녀의 작고 좁은 어깨가 쇠를 달궈 곡괭이와 칼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그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 단단함으로 써낸 소설들이 그와 아이들을 먹이는 수단인 동시에 '보다 아름다운 세상의 건설'이라는 소설의 궁극적 목적에까지 가 닿을 수 있다면 '소설 쓰는 노동자' 공선옥과 놀았던 그 하루가 기자에게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으리라.

"그냥 닭갈비에 소주나 한 잔 하고 가세요"
[취재후기] 술집에서 토해낸 고단한 인생사

애초 공선옥과의 인터뷰는 최근 출간된 기행산문집 <마흔에 길을 나서다>에 관해 몇 가지를 묻고, 작가에겐 생면부지의 땅인 강원도 춘천에서 뭘 하고 어떻게 사느냐를 들어 가벼운 읽을거리를 만들 요량으로 준비됐다.

서울발 춘천행 무궁화호 기차에 몸을 실었던 8일. 하늘 가득 널브러진 7월의 햇살은 평화로웠고, 청평과 강촌에서 만난 물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시원스러웠다. 하지만, 이 시원스런 평화는 공선옥과 그의 세 아이가 사는 아파트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깨졌다.

한 두 시간 준비해 간 질문을 토대로 인터뷰를 하고, 나머지 저녁시간은 지인을 만나 산천어회에 국화주나 마시려던 기자의 계획은 "집이 시끄러우니 어디 근처에 가서 닭갈비에 소주라도 한잔하며 이야기하자"는 공선옥의 뜬끔없는 제의 탓에 초반에 무산됐다.

어디 그뿐인가. 취재수첩과 여기저기서 찾아낸 작가의 관련자료를 꺼내 정식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순간 "춘천까지 와서 일은 무슨 일을 해요? 그냥 재미있게 놀다가요"라는 공선옥의 업무방해성 멘트는 한번 더 기자의 무장해제를 요청하고 있었다.

가져간 수첩과 자료를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공선옥과 기자는 급하게 소주잔을 돌리며 놀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시작한 그 놀이는 자정이 가깝도록 계속됐다. 소박하게 둘이서 시작한 술자리는 지역방송국 기자와 사진작가, 춘천마임축제 사무국장까지 어울린 큰판으로 발전했고, 안주는 닭갈비에서 잘 삭힌 전라도식 홍어회로, 다시 멸치와 땅콩으로 변했다.

장소를 바꿔가며 3차까지 이어진 술자리. 공선옥은 예닐곱 살 아래인 기자에게 반말로 "야, 제발 정색하고 질문 좀 하지 마라. 네가 무슨 취조하는 검사냐"라는 가벼운 주정까지 해가며 흥취한 채 술자리를 주도했다. 멀리서 춘천발 서울행 마지막 열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취기가 가져다준 환청이었을까? / 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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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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