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실의 참담한 기억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93>공장일기(1)

등록 2003.07.10 10:48수정 2003.07.1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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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창원공단 내 생산 현장

창원공단 내 생산 현장 ⓒ 창원시

1978년 3월, 나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란 부푼 꿈을 안고, 화학기능사 2급 자격증을 손에 쥔 채 창원공단에 있는 ***광사(당시 시계로 유명한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나는 내 문학에의 꿈을 가슴 깊이 숨겨둔 채, 새로운 사회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심과 호기심으로 가슴이 마구 설렜다.


그때 나는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과 그 돈으로 우리 가정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나 자신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대한 일종의 자만심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과 어둠의 시작이었다. 그랬다. 그때부터 나는 병역특례라는 올가미에 묶인 채, 8년 동안 감옥 같은 공장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왜 8년이냐고? 병역특례 혜택은 영장을 받은 뒤부터 5년이었다. 또한 당시에는 대부분 고교 졸업 후 2~3년 정도 지나야 영장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컴컴한 삼월의 새벽
맨날 수북히 빠지는 머리칼 모아
바꾸어 둔 시꺼먼 빨래비누
처음으로 꺼냈다
금싸라기 같은 보리쌀로 밥도 지었다
마을에선 소문이 쫘악 퍼졌지만
첫선 보는 처녀처럼 제법 구리무도 바르고
콩콩 뛰는 가슴으로 창원공단으로 갔다
짙푸른 하늘에선
쌀밥 같은 흰구름이 피어오르고
미니버스 창 밖에선
보리쌀알이 철철 쏟아져 내렸다

('이력서 내는 날' 모두)


입사 첫날부터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물거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원래, 화학분석 기능사란 것은 그 회사의 실험실이나 폐수처리장 같은 부서에 근무하는 것이 정해진 이치였다. 그런데 생산부장이라는 사람이 나더러 지금은 생산라인이 너무 바쁘니, 1~2개월 정도만 우선 생산라인에서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강조했다. 처음으로 하는 사회생활이니, 다른 사람들과의 친분관계도 그렇고, 다른 부서의 업무도 미리 알아놓아야 나중에 내가 하는 업무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또한 각 부서끼리는 업무가 오밀조밀하게 엮여져 있으니, 미리 업무파악을 잘 해놓아야 승진도 빨리 할 수 있다고.

"사회에서는 친구도 모두 경쟁상대일 뿐이야."

그렇게 잘라 말하는 생산부장의 그 한마디는 마치 내게 특별대우를 해주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2개월 동안은 견습기간이라는 그 말을 생산부장이 그렇게 비비 꼬아 말한 것이란 것을. 약간은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이미 기능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에게 무슨 견습기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처음 간 곳은 프레스실이었다. 나는 처음에 프레스란 단어의 뜻조차 제대로 몰랐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엄청난 기계소리 속에서 수인사를 주고 받는데, 손가락이 잘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무엇보다도 끔찍했던 것은 장갑의 손가락 부분을 그 잘린 손가락 사이로 돌돌 말아넣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프레스의 굉음 때문에 내 자신이 이 세상 어느 한 끝이 아니면, 다른 세상에 내팽개쳐진 것같은 그런 느낌뿐이었다.

그 다음 날부터 나는 본격적인 프레스실 근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프레스의 굉음이 모두 멈춘 아침조회 시간에 부서 사람들을 대충 세어보았다. 약 50여명 정도였다. 그 중에 절반은 여공들이었는데, 나보다도 나이가 훨씬 어린 여공들이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제법 엹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쑥 들어간 눈동자와 누렇게 뜬 얼굴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일주일을 단위로 야근조, 3교대조, 철야조로 번갈아가며 편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기계에 대한 지식과 기능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프레스실 기계는 대부분 노후되고 낡아서 조금만 실수를 하면 손가락은 물론 손목까지도 날라갈 수가 있는, 말 그대로 흉기였다.

그래. 이 부서가 말로만 듣던 그 무시무시한 프레스실이었단 말인가. 당시 이 공장 내에서도 연마실(가공된 금속의 모난 곳을 없애거나 광택을 내는 곳), 도장실(가공된 제품에 페인트를 입히는 곳)과 더불어 가장 열악한 부서로 손꼽혔던 프레스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환경 속에서도 큰 사고 없이 2개월을 무사히 견뎌냈다. 그런데 3개월이 다 지나가는 데도, 생산부장이 약속한 부서전근이란 문서가 오지 않았다. 그동안에도 내 옆 동료들의 손가락은 기계가 금속을 자르듯이 계속 잘려져 나갔고, 그들 중 일부는 공장으로 돌아왔지만, 일부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다.

그중 가장 가슴이 아팠던 일은 열다섯, 열여섯 살짜리 여성 노동자들의 손가락이 잘려나갈 때였다. 손가락 한마디가 잘려나간 피투성이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병원으로 실려나가던 그 어린 소녀들. 하지만 그녀들 중 대부분은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손가락이 잘려나가면 그날로 위로금과 병원비 일부를 받고 퇴사를 당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a 창원공단 조성으로 마구 파 헤쳐진 목동마을(위)과 그 위에 반듯하게 조성된 창원공단

창원공단 조성으로 마구 파 헤쳐진 목동마을(위)과 그 위에 반듯하게 조성된 창원공단 ⓒ 창원시

미자야
잘린 네 손가락에도 핏물 돌아
금방이라도 손가락이 쑥쑥 자랄 것 같은
피에 젖은 봄이 온다


삼팔선 같은 철망 밖
파릇파릇 쑥이 돋는 남천둑 위로
별똥 같은 어지럼 이는데
완성품으로 잘 다듬어진 총무과 뜰에서
해마다
잘려나가는 여공들 손가락 세며
창백한 얼굴의 목련이 핀다
칲장에 수북히 쌓인 서러움 사이로
시뻘건 녹물이 핀다

못 참아
더러워서 더 못 참아
모여라
어깨 끼고 나가자
피 토하듯 소리치는 미자야
이제는 네 부은 얼굴 위로도
눈물 떨쳐낸 목련이 핀다
마른 살을 떨면서
새벽안개 같은 새하얀 목련이 핀다

('봄 이야기' 모두)


나 역시 처음에는 악을 쓰고 생산부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회사에는 조직이 있어 생산부장은 직접 만날 수가 없었다. 또 생산부장을 만나려면 작업 반장부터 계장, 과장, 차장의 순서대로 결재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현장 노동자인 나에게 그렇게 시키는 것은 아예 생산부장 면담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당시 나는 손가락은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대신 핀셋과 수백만 원짜리 금형을 수없이 박살냈다. 때로는 내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이 내 손가락 대신 잘려 나가기도 했다. 두려웠다. 프레스기는 순간의 실수도 일체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 무시무시한 현실을 어떡하든지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나는 큰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나야 혼자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처럼 타 부서로 전근을 갈 수도 없는 저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 사람들은 매일매일을 저렇게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데, 나 혼자만 좋은 부서에 가서 흰 가운(당시 실험실의 복장)을 걸치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도 나는 그렇게 6개월을 훨씬 넘긴 채 프레스실 근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주위 동료들과의 점차 짙어지는 신뢰와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입사 당시부터 늘 꿈꾸었던 부서 전근이란 낱말도 서서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때쯤 나는 또한번 깨달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료들이 그렇게 자기 배운 기능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각기 주어진 부서에서 새로운 기계를 조작하는 법을 배워, 이제는 자기 전공보다도 더 그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나 역시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프레스 부서의 웬만한 기계의 조작은 물론 수리까지도 손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작업반장 또한 프레스실의 기계에 문제가 생기면 내게 맡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한달만 더, 한달만 더" 하던 부서장도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그런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손가락 없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프레스실 동료들의 끈끈한 정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며, 그들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란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문득 기름진 생산부장의 야릇한 표정이 떠오르기만 하면 괜히 화가 치밀었다.

그랬다.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현장노동자들을 그렇게 체념시키는 것이 그 회사 생산부장의 뛰어난 화술과 전술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알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또한 나는 내게 주어진 일들로 인해서 설령 내 손목이 잘려나간다 할지라도 그동안 정이 든 프레스실 동료들을 내 멋대로 배신할 수도 없었다.

그래. 기왕 잘려나가야 할 손목이라면 내가 설령 프레스실을 피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잘려나갈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체념 속에서 1년이 흐르자, 나는 프레스실 기계들을 작업반장보다 더 잘 다룰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프레스 기계들로 인해서 더 이상의 안전사고가 나지 않게끔 어떤 방편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그날도 5일째 연속으로 이어지는 철야근무를 할 때였다. 밤 10시가 갓 넘었을까? 엄청난 프레스 기계의 굉음 사이로 갑자기 악, 하는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째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린 곳은 주로 프레스실 여성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는 오른쪽 라인이었다.

"또 하나 날라갔다."

동료들이 달려갔을 때, 이미 그 여성 노동자의 손가락에서는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고의 전말은 간단했다. 작업 도중 열여섯 먹은 이 여성 노동자의 기계가 고장 났었단다. 그래서 그 라인의 작업반장이 기계를 고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기계 뒤편에서 손상된 부위(금형 안쪽)를 무심코 손으로 만졌다는 것이었다.(평소에는 누구나 핀셋을 이용했다.)

작업반장은 프레스 기계 앞 쪽에서 아래 위를 훑어보며 수시로 기계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금형 안쪽에 무슨 이물질이 있는 것이 띄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집어넣고 말았던 것이었다. 결국 사고의 원인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문병을 간 동료들은 우스개 소리를 했다. 일종의 자위였다.

"어이! 김 반장, 손가락 한마디 없는 여자를 누가 데려 가겠어. 김 반장이 책임져야지. 어떡할 거야?"

며칠 뒤에 눈치 챈 사실이었지만 그 두 사람은 어려운 형편을 참다못해 몇 달 전부터 남몰래 동거생활을 해오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미성년자가 뭐 어쩌고 저쩌고 하시겠지만, 당시 그들의 삶은 삶이 아니었다. 식의주를 해결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사고가 생긴 몇 개월 뒤, 그들은 조그만 자취방에서 주변 동료들 열댓 명과 조촐한 식사를 하면서 공식적인 결혼을 선포했다. 그리고 동사무소에 가서 정식으로 혼인신고까지 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그들은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식의주에 대한 일종의 공동투쟁을 선언한 것이었다.

a 철새처럼 날아왔다가 철새처럼 떠나버린 현장노동자들

철새처럼 날아왔다가 철새처럼 떠나버린 현장노동자들 ⓒ 창원시

그리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창원공단이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남천이 몹시 맑았다. 그 남천에는 겨울이면 꼭 이들 부부 같은 철새들이 떼지어 날아 들었다. 철야근무를 마치고 희뿌연 새벽에 공장 문을 나서면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몹시 처량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흡사 아침에 나서는 우리들의 슬픈 저항의 목소리 같았다.

그 남천 옆에 있는 마을이 목동마을이었다. 목동마을은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형적인 농촌마을, 목리였다. 하지만 그들 부부가 그 마을에 어슬픈 신혼살림을 차릴 그 당시에는, 창원공단 조성으로 인해 농토는 모두 사라지고, 철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어정쩡한 마을로 변해 있었다. 이름도 목리가 아닌 목동으로 바뀐 채 말이다.

당시,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마을을 버리고 정처없이 흩어지게 될 운명에 처한 목동마을 농민들은 대부분 헛간이나 창고를 개조하여 월셋방을 만들었다. 또한 창원공단으로 무작정 상경한 노동자들은 월세가 싸고, 공장에도 가까운 목동의 월셋방을 많이 찾았다. 그때부터 목리는 전형적인 농촌의 얼굴을 벗어버리고, 찌든 공장 노동자들의 아우성이 깃든 빈민가 목동으로 전락했다.

또한 목동마을에 둥지를 튼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들은 비좁은 방에서도 셋에서 다섯까지 합동 기거를 했다. 이 슬픈 부부 역시 처음에는 목동이란 마을에 제 각각 길 잃은 철새처럼 날아들었다. 그러나 매월 나가는 방세가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이 부부들도 방세를 절약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살림을 합쳤던 것이었다.

우리네 마을은
철새보호구역이 아닌데도
해마다 계절을 잊어버린
온갖 철새들이 번갈아 날아와
이름도 주소도 없는
그러나 당연한 듯 새끼를 친다

어떤 젊은 철새들은
아예 새끼치기도 귀찮은 듯
목동의 팔천 원짜리 셋방 주변을
고된 날개짓으로 자꾸 퍼득이다가
초겨울이 다 지나도 텅 빈
허전한 둥지에 보금자리 틀어
밤새도록 악을 쓰며
사랑을 나누었다

공장 사람들은 보너스 없는
연말의 슬픔으로
밤새도록 막걸리 퍼마시며
또 철야근무 할 생각에 몸서리치다가
퉁퉁 부은 새벽
자석에 끌리듯 떼지어
출근하는 공단대로변

이 시린 하늘에 노동해방 그리며
죄인 같은 공돌이와 공순이의 깃털로 갈아입고
산이 아무리 높아도
떠오를 아침해 기다리며
공단 하늘아 무너져라
썩은 세상아 물러가라
땅이 울리도록 꺼억꺼억 울었다

('철새 서식처' 모두)


인용한 시는 모두 제 필명, 이소리 시집 <노동의 불꽃으로>(1990년, 황토)에 나와 있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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