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보다 상호부조가 진보의 원동력

아나키즘 사상가 <크로포트킨 자서전>

등록 2003.07.10 13:46수정 2003.07.10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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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사회주의 소련과 자본주의 미국이 전세계를 양분했을 때 어느 곳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한 아나키즘이 외면을 받은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양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었던 이들은 양쪽에 의해 왜곡되고,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나, 중앙권력을 혐오하고, 국가기구 자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 세력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역사의 패배자가 되기를 원한 것은 아닐까.

흔히 '무정부주의'나 '테러리즘'으로만 알려진 아나키즘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 나왔으니, 바로 크로포트킨 자서전(우물이 있는 집 刊)이다. 보로딘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했던 크로포트킨은 1842년에서부터 1922년까지 활동한 아나키즘 사상가다.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황실 경호를 책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위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장교 출신이면서,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홈볼트의 오류를 교정하고 북극해 군도의 존재를 예측한 지리학자였다.


또한 아나키즘 사상가로 '빵의 정복' '상호부조론'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윤리학' 등의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아나키즘에 경도된 단재 신채호가 영향을 받았던 책도 바로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이다. 생물계 진화의 요인으로서 생존경쟁과 함께 상호부조의 원칙을 정리해, 아나키즘사상에 생물학적 기초를 부여한 것도 그였다.

이 책은 귀족과 노동자, 황제의 시위, 문인, 학생, 관료, 과학자, 탐험가, 행정관, 혁명가로서 다양한 삶을 산 그를 통해 목가적이면서도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한 시대를 보여준다. 충성스런 하인들과 선한 농노들의 모습, 봉건적인 가정생활, 공화정과 왕정이 교차되던 가운데 벌어지던 왕실내의 암투, 황제나 귀공작 같은 러시아 최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와 함께 세계 5대 자서전 중의 하나로 추천되는 것도 유려하면서 낭만적인 필체에서 비롯된다.

독자는 지주가 명령한 결혼을 거부하다 25년간의 군복무를 하게 되는 하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답답함을 느끼다가, 전선에 서보지도 못하고, 개와 싸운 무용담만 늘어놓은 장군의 이야기에서는 웃음을 머금게 될 것이다. 또한 교사들이 동료 교사의 하숙집에서 모였다는 이유만으로 면직 처분을 받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젬스트보(지역 의회) 의원들이 황제에게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야만의 역사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쉴 수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의 모습들이 저자의 눈을 통해 풍부하게 되살아나지만, 정작 저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는 엄격할 정도로 자제를 한다. 그는 언제 연애를 했는지, 이성과의 관계는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결혼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였다는 사실도 말년 부분에서 딱 한 번 드러날 뿐이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바쿠닌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수많은 혁명가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그들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저자가 가진 각각의 세력들에 대한 생각과 아나키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노동자들은 각국과 지역, 지부가 자율적으로 자유롭게 발전해야 한다는 연합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노동자 협회의 중산층 출신의 구파 혁명가들은 낡은 중앙집권적 피라미드 형태의 결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전국의 위원회들을 매개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 지도자였다."


"나는 쥐라연합에서 아나키즘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바쿠닌이 이렇게 말했다'라든가 '바쿠닌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기준으로 결론내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정당에서 흔히 보듯이, 바쿠닌의 글과 말은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계율이 아니었다."


이 책은 노혁명가의 삶의 고백이지만, 어느 수필 못지 않은 따뜻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저자가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지극히 선한 영혼의 소유자였다는 점이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두고 감시하는 정부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악직절인 감옥의 의사에 대해서도 "그가 좀더 말이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아나키즘이 '사회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하는 것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미래사회의 인간적인 연대로 이어진다는 믿음'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농민들에 대한 강렬한 인상에서도 기인한다.

"러시아의 농민은 지주나 경찰 앞에서 노예처럼 복종하기는 했으나 그들을 자신보다 잘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러시아 농민에게서, 하급관리가 상관을 대하거나 하인이 주인을 대하는 것 같은,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노예근성을 보지 못했다."

크로포트킨은 로마제국을 본든 개인주의적 국가의 발달이 상호 협동했던 중세 도시제도를 송두리째 파괴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런 양상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억 5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러시아는-지구 인구의 1/8, 지구 대륙 면적의 1/6을 차지하는-로마 같은 제국이 아니라 평화적으로 문명과 진보를 이룩하는 민족연합이 될 것이다."

책 뒤에는 '크로포트킨과 아나키즘'이란 제목으로 19세기 아나키즘운동 개요와 국제사회주의 운동의 흐름, 바쿠닌의 사상, 크로포트킨의 사상, 러시아 혁명의 진행과정, 크로포트킨 연보 등이 실려 있다.

크로포트킨 자서전 - 인류의 품격있는 진보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유곤 옮김,
우물이있는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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