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애도행렬 줄이여

국민훈장 무궁화장 전달

등록 2003.07.12 06:40수정 2003.07.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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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저녁 7시 30분, 광주YWCA 대강당에 차려진 故 조아라(YWCA명예회장)선생 빈소에 정찬용 인사보좌관이 방문해, 헌화 분향을 마치고,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고인의 영정 앞에 전달했다.

정찬용 인사보좌관 국민훈장 무궁화장 전달
정찬용 인사보좌관 국민훈장 무궁화장 전달김성철

정찬용 인사보좌관은 무궁화장 수여식을 통해 "광주를 지켜주셨던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조아라 어머님을 잃은 슬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제 귀국한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광주에 오고 싶어했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저에게 직접 애도를 표현했습니다."

故 조아라(YWCA명예회장)선생의 장례식은 12일 오전 9시 YWCA 대강당에서 하고, 장지는 5.18국립묘지에 안장하기로 했다.

'광주의 어머니'로 알려진 고 조아라 선생은 1912년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광주에 있는 수피아여고에 입학하여, 일제치하에 설움을 겪고는 교내에다는 연극반을 만들어 민족주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1933년 수피아여고 교사로 재직 중에는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발각되어 1년간 옥고를 겪었고, 1936년에 수피아여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또 한번 옥고를 겪었다.

1980년 5.18때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서 6개월 동안 옥고를 겪는 등, 그 외에도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이에 대해 장남인 이학인 목사는 "감옥이 무서운 줄 모르고 투쟁만 하다가 감옥을 자기 안방처럼 드나들며 사신 분입니다. 다른 것은 하나도 욕심이 없으면서 광주의 어머니로서 욕심 애착은 많았습니다. 이는 무등산이 있었고 광주가 있었고 망월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찬용 인사보좌관 유가족 위문
정찬용 인사보좌관 유가족 위문김성철

생전에 조아라 선생과 각별한 사이로 인연이 깊었던, 윤형규(전 전교조 위원장)선생, 강신석(무진교회)목사, 안성례(5월 여성회)회장을 차례로 만나 고인에 대한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윤영규(전 전교조위원장)


큰아들과 절친한 친구이다. 그가 일찍 미국으로 건너가 내가 어려서부터 큰아들 역할을 하면서 친어머니처럼 모셨다. 그때 다들 힘들게 살면서도 싫은 기색 한번 보이지 않았다.

몇일 전 병원에 누워 계실 때 찾아갔었는데 6개월 동안 의식을 잃고 있는 상태라 저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은데, 담당주치의가 6개월만에 의식이 약간 돌아 온 것 같다며, 마지막으로 성내운 교수(작고) 사모님을 알아보시더니 결국 2∼3시간 후에 돌아 가셨다고 연락이 왔다.

조아라 선생은 수피아여고 들어가면서부터 민주자주 의식이 강했다. 수피아여고 학생시절에도 옥살이를 하였고, 연극을 하면서도 일경들에게 붙들려가서 사상이 불온하다하여 옥살이를 했다.

해방이후에는 도청에 처음 생긴 후생국 부녀계장(1947~1954년)을 맡으면서 여성들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했고. 6.25때는 전쟁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성빈여사'를 개원했고, 이어 계명여사를 지여 불우한 여성들을 도왔다.

또한 이희호 여사가 59년부터 YWCA연합회 총무를 하고 있을 때, 62년도에 김대중 선생이 결혼 제의를 받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가겠다고 반대했는데, 조아라 선생이 나서서 '사람 하나 보고 시집가라 내가 보기에는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다'며 결혼을 성사 시켰다.

5.18때는 광주의 아들딸을 지키기 위해 고통받는 역할을 스스로 자청했다.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6개월 동안 갇혀 지내면서 좌골신경통에 걸려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가해자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용서해주었다. 출옥해서는 생계가 곤란한 수감자 가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며, 경제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강신석 목사님

우선 조아라 선생과 고향이 같고, 양림동에 살 때는 친어머니처럼 부르며 살았다. 그러다가 76년 유신반대를 하다가 긴급조치에 걸려 광주경찰서 구치소에 10일동안 갇혀 지냈다. 다들 돼지막 같은 곳이라고 불평불만을 얘기하는데 조아라 선생은 불평 한마디 없이 끝까지 의연한 자세를 취했다.

그 후, 5.18때도 함께 수감생활을 했는데, 보안대 직원들에게도 너무 잘해주시니까 오히려 탄복을 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보았다.

출옥해서 윤한봉 선생을 가장 크게 걱정을 했어요. 성질이 하도 급해 숨어 지내다가 들킬 염려가 많았다. 붙잡히면 사형이었다. 조아라 선생은 젊은 활동가를 죽여서는 안 된다며 궁리 끝에 미국으로 밀항시키기로 하고 모든 자금과 뒷일을 책임졌다. 밀항 전날 윤한봉 선생이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며 잠실에 와서 기도를 해달라고 연락이 와서 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다.

원양어선에 숨어서 도착예정일 보다 5일 먼저 LA약속장소가 아닌 씨애틀에 도착하면서 일이 갑자기 꼬여 거기에 사시는 우리 교단 목사님께 연락하여 서로 암호를 교환하여 맞으면 차 트렁크에 싣고 빠져 나오도록 했는데 서로 암호가 틀려 처음에 싣고 나오지 못했다. 나중에 신원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차 트렁크에 실어 항만을 빠져 나와 밀항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때 다들 조아라 선생의 영적인 기도에 힘입어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따르려고 했던 분입니다.

안성례(5월 여성회) 회장

조아라 선생은 명노근 교수(2년전 작고)와 결혼해서 우리가 정말 힘들고 고통 받을 때 많은 도움을 줬다. 5.16때 명교수가 대학에서 군대문제로 물러났을 때 정말 가족처럼 지냈다.

조아라 선생은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리스도의 정의, 평화,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리고 헌신하였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민족 자주 독립정신과 민주 평화 통일 인권을 위해 평생을 투쟁하였다.

헐벗고 가난한 자들을 보면 자비를 털어서 도와 주었고, 가정부들이 야간에 공부할 수 있도록 '별빛학원'을 만들어 다니게 하였고, 보릿고개가 심할 때는 미국 독일에까지 가서 원조를 요청하여 들여왔고, 오 갈곳 없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교육까지 시켜 주었던 그런 선행들은 다 셀 수 없다.

특히 여성으로서 보기 드물게 '예' '아니오'가 확실하고, 선한 일이라면 반듯이 실천에 옮기며, 나서야 할 때 반드시 나서는 용기가 있다.

바로 이런 삶들이 예수님을 닮으려는 형상이다. 그래서 앞으로 저희 사회여성 단체들은 조아라 선생의 철학 삶 종교 등을 계승 발전 시켜나가기 위해 늦봄(문익환)추모사업회가 한 것처럼 추진해 나가겠다.

고 조아라 선생은 광주의 어머니가 아닌 분명 한국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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