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평등을 향한 92년 세월

고(故) 조아라 여사의 삶

등록 2003.07.12 17:44수정 2003.07.13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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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98년 무등여성대상 수상 기념사진

1998년 무등여성대상 수상 기념사진 ⓒ 광주YWCA 제공

지난 8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故) 조아라 여사는 '광주의 어머니'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역사의 고비에서 호남이 상처 입을때마다 포근히 안아주던 넉넉한 존재였다.

1912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조아라 여사는 부친이 사재를 털어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성경과 신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아라 여사는 광주 수피아 여학교에 진학하면서 YWCA에 헌신하는 계기를 맞는다.

1931년 수피아 여학교를 졸업한 뒤 이일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비밀결사조직인 '백인청년단 사건'에 주동자로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인해 조 여사는 일제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분류돼 해방이 될 때까지 예비검속에 시달렸다.

일제강점기간 조 여사는 신사거부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또 한번의 감옥생활을 해야했다. 1936년 창씨개명, 신사참배, 동방요배 참여 혹은 폐교를 강요받던 수피아여학교는 폐교를 선택했다.

일제는 수피아여학교의 폐교결정에 보복하기 위해 조 여사를 감옥에 보냈는데 그 이유는 조 여사가 수피아여학교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38년 결혼한 지 3년 10개월만에 남편을 병으로 잃는 아픔까지 겪게 된다. 조 여사는 일제시대에 대해 "참 징글징글했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한 생을 바친 YWCA운동

a 2003년 봄 성빈여사 아이들과 함께.

2003년 봄 성빈여사 아이들과 함께. ⓒ 광주YWCA 제공

해방후 조 여사는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여성운동의 기반을 일구는 한편 폐교됐던 수피아 여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 여사는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제대로 된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여성들의 참여를 강조하면서 '건국준비 광주부인회'를 출발시키고 '독립촉성부인회 광주전남' 총무를 맡았다. 또한 광주YWCA 재건에 나서 30대 초반인 1945년 9월에 광주YWCA 상무이사에 선임돼 특유의 성실함과 추진력으로 광주YWCA 발전의 기반을 닦았다.

이후 1947년부터 26년간을 광주YWCA 총무로 1979년∼1983년까지 회장, 그리고 타계할 때까지 명예회장을 맡아 활동하며 광주YWCA와 여성운동 발전에 열정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열정적으로 사회운동을 펼쳤던 조아라 여사에게 한국전쟁은 또 다른 헌신과 봉사를 요구했다. 전쟁의 참화로 부모가 죽거나 버림받은 아이들을 거둬 새로운 삶을 살게 했던 것이다. 조 여사는 전쟁고아를 위해 1951년 성빈여사(聖貧女舍)를 세우게 된다.

애초 성빈여사의 목적은 중학교 들어갈 나이의 여자아이들을 대상으로 기숙사 생활을 통해 학교교육을 시키는 것이었지만 육아원으로 확대됐다. 생전의 조 여사는 "…그런데 동생을 데리고 오는 애들이 자꾸 생기는 거야. 자기들끼리라도 헤어지지 않게 하려고 같이 받아들이다 보니 애기들도 많아져서 결국 육아원이 됐지"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전쟁중 최고 220명이 생활했던 성빈여사는 현재 영아부터 대학부까지 79명의 보금자리로 광주시 남동에 뿌리내렸다.

80년 5월, 광주의 어머니로

조아라 여사는 70세 되던 해 5·18항쟁을 겪게 된다. 80년 5월 19일 서울에 있던 조 여사는 광주의 참상을 전해듣고 20일 아침에 광주에 도착했다.

계엄군의 잔악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조 여사는 당시 광주에 있던 미공보원으로 가 책임자를 만나 항의했다. 전남대 5·18연구소가 보관하고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것이 지금 무슨 일이오. 당신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존중한다면서 왜 죄없는 시민들을 죽이는 거냐"며 "한미연합사령부가 군지휘권을 갖고 있으면서 이렇게 군인을 투입해 양민을 학살하다니"라고 따졌다.

a 강연하던 모습. 표정이 해맑다.

강연하던 모습. 표정이 해맑다. ⓒ 광주YWCA 제공

조 여사는 곧바로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더 이상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장악한 29일 새벽 경찰에 의해 연행됐고 상무대 영창 시멘트바닥에서 70 노구를 이끌고 어린 학생 및 시민들과 함께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소후 조 여사는 독재정권의 감시와 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폭도로 낙인찍힌 5·18항쟁 관련자들과 유가족들을 끊임없이 보살펴 민주화 운동의 대모이자 '광주의 어머니'로 추앙 받기에 이른다.

정의와 평등을 향한 고인의 열정은 민주화 운동뿐만 아니라 통일운동에도 이어져 80세 되던 1992년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 참석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고인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오찬을 같이하는 자리에서 "신년사에서 밝힌 1995년 통일 약속을 지켜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 고인의 강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인의 요구를 받은 김 주석은 즉답을 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또래에 비해 '신문물'을 일찍 접할 수 있었던 고인은 자신의 좋은 조건을 개인의 영달에 이용하기보다 민주화와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 평생토록 활용했다. 비록 고인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했지만 고인이 밟고 간 가시밭길은 사랑과 정의가 충만한 옥토로 변했다.

고인이 차지한 자리가 얼마나 컸는지는 강신석 목사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강 목사는 고인을 가리켜 "말 그대로 광주의 어머니이셨다"며 "평생을 변함없이 광주를 광주되게 지켜주셨던 어머니 노릇을 해주셨다"며 고인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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