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호박잎쌈 싸는 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29>호박잎쌈

등록 2003.07.15 08:01수정 2003.07.15 10:2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호박잎 싸먹을 땐 왜 침이 꼴깍꼴깍 몰릴까? 국에다도 말아드세요. ⓒ 김규환

호박잎쌈 드셔보셨어요?

어릴 때 나는 호박잎을 무던히도 먹었다. 특히 여름철에는 이틀에 한 번은 먹었던 것 같다. 소나 염소와 같이 풀이나 넝쿨을 소죽을 쒀 먹는 게 아니다. 보리밥에 호박잎을 데쳐서 쌈을 싸 맛있게 먹었다.

아직도 난 그 맛을 잊지 못하여 이 때가 되면 호박잎 찾으러 시장으로 간다. 시장에서 사다가 먹으면 감칠맛 나기에 이른 봄 호박을 직접 심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애호박도 먹고 호박잎도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호박은 여름부터 겨울까지 한사코 한국사람 근처에서 떠나질 않는다. 6월부터 나오기 시작하지만 장마철에 절정에 이른다. 애호박, 조선호박이 시장에 쭉 깔려 발길을 잡는다. 8월까지는 여린 호박철이다가 9월부터 센 호박 나오니 호박쪼가리 말려 겨울 마른 나물을 준비한다. 서리 올 즈음 누렇게 호박이 익어 겨울철 호박죽으로 입맛을 돋궈 주기도 한다. 봄 한 때 빼곤 내 입맛을 늘 즐겁게 한다. 그 한 줄기에서 나오는 생산물 치고 버릴 게 별로 없다.

그 중 나는 줄기가 쭉쭉 뻗치는 조선호박을 좋아한다. 넝쿨도 정이 들었다. 정이 들면 고향이라 했다. 그러니 고향만큼이나 호박넝쿨을 애지중지 다룬다. 아무데나 마구 뻗어가는 호박넝쿨이 귀찮아 마구 걷어서 던져버리기 일쑤지만 조심조심 다뤄준다.

a

호박잎쌈 잘하면 살림꾼.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저 줄기를 두세번 나눠 꺾어 쭉 벗기면 잘 벗겨집니다. 그 다음 하얀 뒤쪽을 몇 개를 포개 살살 비벼주고 씻으면 끝. ⓒ 김규환

호박잎 꺾으러 가는 비 오는 날 오후

호박이 무, 감자를 대체할 무렵 여느 때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그쳤다 싶으면 또다시 내리는 장맛비를 맞고 호박 덩굴이 쭉쭉 뻗어 나간다. 하루가 다르게 뻗어나가는 덩굴에 여린 호박잎이 새로 선보인다.

이 때는 상추가 물러 터지는 시절이다. 그러니 새로운 쌈 거리를 찾아야 한다. 쌈이 최고 반찬인지라 한번 먹으려면 호된 비를 맞아가며 호박잎을 어렵게 따온다. 꺾는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질게 된 흙에 발이 풍풍 빠지면서도 호박잎을 한 장 두 장 따 나간다. 한 가족 먹으려면 스무 장에서 마흔 장은 보드라운 것만 골라 꺾어야 했다.

왼손에 줄기를 잡고 오른손으로 툭 꺾는 그 소리는 장마철 꽤 공명한 느낌의 소리를 선사한다. "통~" 또는 "퉁~"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맑은 소리를 내던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하다.

꺾은 호박잎이 먹을만큼 되면 집으로 돌아오며 다듬는다. 기다랗게 꺾인 줄기 부분을 다시 두어 번 줄기를 나눠 꺾어 잎 쪽으로 질질 끌고 가듯하면 겉껍질 가시 달린 듯 꺼칠꺼칠하며 영영 드셀 것 같던 줄기가 일시에 무너지고 만다. 어머니를 도와 호박잎을 얼마나 많이 꺾어왔을까?

a

호박잎과 풋고추 씻어서 담아뒀습니다. 가능하면 물기를 조금 빼는 게 좋습니다. ⓒ 김규환

호박잎 손질과 맛있게 데치는 요령

집에 오면서 다듬거나 도착해서 껍질을 벗기며 모자(母子) 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잠시 동안 나눈 대화가 얼마나 달고 맛있던지…. 어머니는 몇 개를 남겨두고 나에게 마저 다 하라고 하시고는 밥을 앉히러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호박잎 데치는 방법은 간단하다. 미리 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하고 거품을 물고 밥이 끓으면 얼른 솥뚜껑을 열고 그 위에 데지 않게 조심해서 살짝 얹어 놓으면 된다. 매콤한 풋고추 대여섯 개와 함께 넣는다. 처음부터 넣으면 죽이 되다시피 하니 이 때가 적당하다.

넣기 전 씻으면서 호박잎 뒷부분을 손으로 살살 비벼 꺼칠꺼칠한 가시를 떼내고 차곡차곡 포개서 한 번에 밀어 넣으면 푸르스름하던 것이 맛있는 밥물을 머금고 숨이 죽어 누르스름하면서 파란 기운이 약간 남아 있다.

밥 푸기 전 그릇에 담아내면 이 한 가지로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아주 큰 것은 반으로 나눠 싸도 되고 작은 것은 그냥 싸 먹으면 된다. 줄기가 붙어 있는 것이 훨씬 더 씹는 맛도 있어 좋다.

a

삶아진 호박잎을 꺼냈습니다. 밥 풀이 묻어 있는데 보이신가요? 전기 밥통에 해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양을 조금 줄여 끓으면 바로 넣으세요. ⓒ 김규환

호박된장국에 먹으면 더 맛있다

밥 불 때는 것은 나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밥솥 절반쯤 되는 옆 아궁이 가마솥에 국을 앉히신다. 솥바닥을 조금 넘게 뜨물을 먼저 붓고 호박잎을 둘둘 말 듯 모아 길쭉하게 썰어 넣는다. 마늘 양파와 매운 고추를 썰어 넣고 국 멸치 몇 개를 손으로 쏵쏵 비벼 넣는다. 멸치 똥만 빼고 머리째 넣어야 국물이 더 진하고 맛있다.

밥 뜸들이고 나면 옆으로 옮겨 국솥에 불때는 것도 내 몫이다. 끓기 시작하면 호박을 칼로 엇비슷하게 착착 쳐서 넣으신다. 그래야 물러서 죽이 되는 일이 없고 호박잎과 무른 정도가 비슷하여 국으로서 기능을 한다.

이 호박잎된장국은 간혹 아욱국 먹는 것 빼곤 가을 찬바람 불 때까지 물리도록 먹었다. 하지만 거기에 고춧가루 조금 풀면 매운탕 가까운 맛이 나도록 깔끔하고 맛있었다. 밥을 한술 두술 말면 어찌나 잘 들어가는지 모른다. 약간은 거친 듯 한 호박잎에 줄기가 씹히고 애호박이 부드럽게 한꺼번에 들어가니 보리밥이어도 감칠맛 난다. 호박만으로도 이렇게 조화로운 국을 끓일 수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a

푹 숨죽은 풋고추를 썰고 있습니다. 양념장이 적당히 매콤하면서도 부드럽습니다. ⓒ 김규환

호박잎 쌈거리 맛있는 양념간장 만들기

국이 끓고 나면 불을 잔불로 줄인다. 그 사이 어머니는 밥을 한번 휘휘 흔들어 함치르르 하게 하기 위해 안에 있던 호박잎 찐 것과 풋고추를 꺼낸다. 뜨거운 걸 꺼낼 손에 물 한번 묻히고 그 뜨거운 김과의 전쟁을 거뜬히 해낸다.

꺼낸 호박잎은 넓은 접시에 담아두고 밥물에 야들야들 익은 풋고추를 숭숭 썰어 양념장을 만드신다. 양념장 만들기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간장을 넣고 삶은 풋고추를 넣고 마늘 다진 것, 양파 잘게 썬 것을 넣고 참깨 조금과 고춧가루 듬뿍 마지막으로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된다.

a

이 양념장에 드시면 맛이 달라집니다. 이 장을 주는 집이 거의 없더군요. 꼭 해서 드셔보세요. ⓒ 김규환

옹기종기 모여 앉아 호박잎쌈 먹는 저녁

밥에 검불로 약하게 불을 때 뜸들이기를 마치고는 밥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열어라" 하시는 어머니 말씀에 쪽문으로 상을 받아들인다. 국그릇과 밥그릇만으로도 한 상 가득하니 허리가 휠 지경이다.

어슴푸레 날이 저물고 방안엔 호롱불 하나만 달랑 켜져 있다. 뒷걸음질을 치며 밥상을 방 한가운데에 나란히 놓고는 아버지 모시고 형제들 들이니 맛나지 않던 것이 없었다.

왼손에 호박잎 펼쳐 놓고 밥 한 숟가락 가득 뜨고 삶은 고추 두 조각 얹어 살며시 포개서 입으로 쏘옥 넣는다. 호박잎 그 풋풋한 향기에 보리밥 내음에 간장 그 깔끔하고 매콤한 맛이 어울린다.

입안에서 몇 번 씹을 일 없이 사르르 녹으니 그 맛 평생 못 잊으리라. 쌈을 먹으면 왜 그리 빨리 배가 불러오던지 내 작은 배가 한탄스러웠다. 김을 싸 먹을 때는 서로 눈치 보며 한 번 싸 먹을 것을 두 장 세 장으로 나눠 먹었다. 하지만 호박잎은 밭이나 담벼락에 지천으로 있어 그럴 일이 없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푸짐하게 먹어서 소화도 더 잘되었다. 맘 편히 먹으니 그랬던가 모르겠다.

a

잘 쪄진 호박잎에 아래 양념장을 얹어 드세요.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판도라의 상자' 만지작거리는 교육부... 감당 가능한가
  5. 5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