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가 만들어내는 그루브의 향연

재즈 트럼페터 로이 하그로브의 Hard Groove

등록 2003.07.15 08:12수정 2003.07.15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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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로이 하그로브(Roy Hargrove)의 'Hard Groove'

로이 하그로브(Roy Hargrove)의 'Hard Groove'

텍사스 출신 트럼페터 로이 하그로브(Roy Hargrove)는 분류하자면‘천재’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것도 퀸시 존스(Quincy Jones) 류의 천재성이 아니라,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와 비슷한 ‘번쩍번쩍 빛나는’ 재능을 지녔다.

막상 말해놓고 보니 마일즈 데이비스를 연상시키는 면모가 한둘이 아니다. 우선 같은 트럼페터라는 점, 그리고 어려서부터‘신동’으로 주목받았다는 점이 흡사하다. 또한 고교 시절에 윈튼 마샬리스(Wynton Marsalis)에게 발굴된 경력 또한 17살에 에디 랜들(Eddie Randle)의 블루스 밴드에 가담한 마일즈의 연표와 비교할 만하며, 스무 살이 되던 해 첫 리더작 'Diamond in the Rough'(1989)를 발표한 점 또한 스물 세 살에 역사적 음반 'Birth of the Cool'(1949)을 내놓은 마일즈를 연상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활동 기간 내내 재즈의 음악적 영역 확장을 꾀해 온 면모마저도 두 신구 명인은 닮은 점이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모달 재즈부터 퓨전 재즈까지‘창시’하며 재즈 신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로이 하그로브는 그룹 크리솔(Crisol)과 함께한 1997년작 에서 'Havana'보여지듯 흑인 음악의 다른 영역 탐구를 통해 침체된 재즈 판을 일신하려 노력해 왔다.

하그로브 본인도 종종 마일즈 데이비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해 왔고, 또한 암암리에 마일즈의 거대한 발자취를‘의식’하며 활동해 왔던 것 같다. 허비 행콕, 마이클 브랙커 등과 협연한 'Directions In Music'(2002)은 자신의 음악적 이상향(!)인 마일즈 데이비스에 바치는 하그로브의 오마쥬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이는 과거의 영웅들에 대한 헌사를 통해 자신들(행콕, 브랙커, 하그로브)이 하고 있는 음악이 ‘정통’에 기반한 것이며, 맥락도 족보도 없는 ‘사생아’가 아님을 입증하는 의미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본인의 음악성이 ‘정통’에 ‘정통’함을 증명한 하그로브는 이제 새 음반 [Hard Groove]를 통해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딛는다.

아마도 하그로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 해온 이들이라면, 그가 2000년 한해 동안 커먼(Common)의 'Like Water For Choolate', 디안젤로(D’Angelo)의 'Voodoo', 에리카 바두(Erykah Badu)의 'Mama’s Gun'에 잇달아 참여한 사실을 통해 그의 새로운 음악적 관심사를 알아챘을 것이다. 바로 네오 소울과 힙합 등 이른바 (재즈와 비교해)’젊은’ 블랙 뮤직. 과연 21세기를 사는 신동 재즈맨다운 선택이다.

많은 매체에서는 이 음반을 놓고 디안젤로, 에리카 바두, 큐팁(Q-Tip), 커먼(Common) 등 호화로운 게스트 진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촉망받는 재즈 연주자가 소울, 힙합 등 대중적인 음악을 시도했다는데 관심을 갖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도 필자는 로이 하그로브 본인의 역량과 탁월한 장르 해석에 중점을 두고 싶다.


표면적으로는 네오 소울과 훵크, 힙합 등을 차용해서 음악적 백화점을 차려냈다지만, 이런 다단함이 무리없이 하나의 음반으로 ‘균질’을 이루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하그로브의 능력이다. 브랜포드 마살리스(Branford Marsalis)의 비슷한 프로젝트인 벅샷 르퐁끄(Buckshot Lefonque)의 경우 하드코어와 리듬 앤 블루스를 오가는 종잡을 수 없는 음악으로 악평을 받은 데 반해, Hard Groove의 노래들은 다소 어둡고 블루지한 무드를 매개항으로 일관성을 유지한다.

여기에 하그로브가 트럼펫을 이용해 선보이는 여러 선험적 시도, 그리고 드러머 윌리 존스(Willie Jones)가 음반 내내 보여주는 그루브 넘치는 드러밍 등이 음반의 통일성에 크게 일조한다. 아마도 밴드 리더로서, 프로듀서로서 하그로브의 천재가 아니었다면 Hard Groove와 같은 시도는 구심점을 잃고 장르 백화점이 되었을지 모른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음반의 시작은 정교한 기타 리프를 배경으로 관악 잼 세션이 펼쳐지는 “Hard Groove”다. 여기에 커먼이 프리스타일 랩을 하는 “Common Free Style”이 이어지는데, 앞의 곡에서 후반부 격렬한 임프로바이제이션으로 달아오른 트럼펫은 이 곡에서 ‘와와’를 밟으며 재등장한다. 대조적인 스타일의 두 트랙이 ‘지적인 스타일’과 ‘트럼펫’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광경이다.

또 하나 이야기할 것은 로이 하그로브의 ‘장르’에 대한 탁월하고 독창적인 해석력이다. “Common Free Style” 같은 경우, 재지한 사운드를 배경으로 랩이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기존 어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와 차별점이 없다. 그렇다면 여기엔 커먼과 로이 하그로브 사이에 주객이 전도되는, 다시 말해 커먼의 작업에 하그로브가 피처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위험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그로브가 와와 이펙트를 사용해 만들어낸 왜곡된 트럼펫 선율은 곡의 주인이 뒤바뀌는 것을 멋지게 막아낸다.

에리카 바두와 큐팁이 참여해 녹아내릴 듯한 챈트(Chant), 랩, 보컬을 들려주는 “Poetry”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Out Of Town”이나 “Juicy” 같이 참신한 일렉트로 훵크 곡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어떤 곡에서도 트럼펫 연주가 ‘메인’이 되고 있으며, 해당 장르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동반된 가운데 사운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점들은 “재즈 연주자가 훵키를 연주한다 해서 꼭 재즈 내에서 구사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훵키만 잘 연주하려고 하면 된다”는 로이 하그로브의 지론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더해 로이 하그로브의 천재성에 대한 다른 증거들, 가령 베이스와 퍼커션, 건반, 플루겔혼 등을 혼자 연주해냈다는 얘기는 사족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Hard Groove는 ‘재즈가 더 이상 대중 음악이 아닌’ 시대의 ‘불가피한(필연적인)’ 시도가 담긴 음반이다. <다운비트>지의 찬사처럼 이 음반이 Bitches Blew에 비할만한 역사적 음반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지만, 현재의 답보 상태에 있는 재즈신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무리한 가정을 해 본다면, 마일즈 데이비스가 여지껏 살아있다면 시도할 수밖에 없을 음악이 이것 아닐까.)

바야흐로 21세기의 재즈맨은 외롭고도 괴롭다. 동네 선술집에서 밤낮없이 들려와야 할 대중의 음악이 한낮 여피들의 고급스런 취향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Hard Groove의 눈부신 리듬 파티 속에서도, 어딘지 모를 어두움과 비애가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나 능력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천재의 슬픔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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