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86

장일정 제왕비를 얻다. (3)

등록 2003.07.17 12:42수정 2003.07.17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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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을 보는 다른 죄수들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그야말로 목불인견의 참상에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태원부 무천장의 부장주였던 장한은 얼굴이 없어졌다. 얼굴의 살갗은 모두 벗겨졌고, 이빨마저 부러져 나갔다.


이러고도 죽지 않은 것은 무천의방에서 보내온 금창약 덕분이었다. 뛰어난 의술을 지닌 의원들이 만들어 그런지 웬만한 상처로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정도로 효능이 좋았던 것이다.

이날 숨쉬기를 마치고 다시 팔열지옥갱으로 향하는 동안 모두의 얼굴엔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항변조차 못하는 참담함과 더불어 공포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사면호협만은 예외였다.

풀었던 쇠사슬을 다시 족쇄에 끼울 때 그는 끼우는 시늉만 하였다. 그리고는 제대로 연결 된 것처럼 움직였다.

다행히 다친 죄수에게 모두의 이목이 쏠려 있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탈출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날 밤, 모두가 골아 떨어져 코를 골고 있을 때 슬그머니 일어나는 인영이 있었다. 사면호협이었다. 도주하다 발각되면 최하가 불구라는 것을 알지만 철천지원수인 혈면귀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탈출을 감행하려는 것이다.


팔열지옥갱에 처음 갇힐 때만 해도 사면호협에겐 새치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룻밤만에 팔십 먹은 노인처럼 머리에 허연 서리[霜]가 내려 버렸다.

흔히들 약재 중 하나인 지황(地黃)을 잘못 먹으면 하룻밤에 머리가 몽땅 센다고 한다. 그래서 지황을 쓸 때는 삶아서 사용하고 이를 숙지황(熟地黃)이라 부른다. 사면호협은 지황을 먹은 것도 아니건만 하룻밤 새에 머리가 몽땅 세어 버린 것이다.

무천장주에서 강등당한 것 등은 다 괜찮았다.

그러나 너무도 사랑하던 연화부인 사인옥을 간살(奸殺)한 혈면귀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분노에 떨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뚫고 한 인영이 황산의 계곡으로 내려간 것은 동도 트지 않은 한밤중이었다. 천우신조인지 전날 팔열지옥갱 소속 정의수호대원들은 한바탕 술판을 벌였다. 임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원을 환송하기 위한 연회였다.

모처럼 멀리 떨어진 저잣거리에서 기녀까지 불러들였기에 마땅히 근무를 서야할 대원까지 술자리에 끼어 들었다.

어차피 팔열지옥갱의 죄수들은 오십 명씩 묶어 두었기에 한꺼번에 이동하기 전에는 탈옥이 불가능하기에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단 한번도 탈옥하는 사건이 없었기에 방심한 것이기도 하다.

“헉헉! 헉헉헉!”

계곡 아래로 내려가는 사면호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추격자가 있나 불안했던 것이다.

“헉헉! 헉헉헉!”

하옥되면서 내공을 모두 잃었지만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탈출하려고 열심히 근력을 키운 덕분에 몸놀림은 경쾌하였다.

“헉헉! 이놈, 혈면귀수! 네놈을 반드시… 으드득! 헉! 누구?”

한참 계곡 아래로 내려가던 사면호협은 느닷없이 나타난 두 인영을 발견하고는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탈출하다 생포되면 거의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 * *

“그 동안 정말 수고가 많았네.”
“수고는요 무슨… 그나저나 너무 오래 걸린 것은 아닌지요?”

“허허! 오래 걸리긴 정말 오래 걸렸지. 아마 제세활빈단이 생긴 이래 가장 오래 걸렸을 것이네. 뭘 하느라 그리 꾸물댔는가?”
“예에…? 무공을 익히느라…”
“허허! 거기에 그렇게 오래 익힐 것이 있었는가?”

화담 홍지함의 대꾸에 이회옥은 낯을 붉히지 않을 수 없었다. 인사치레였는데 이렇게 받아칠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이구! 이거, 어르신을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허허허! 아닐세. 농(弄)이었네. 그나저나 대성했는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환한 웃음을 짓던 화담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 순간 세상이 무너져도 변화가 없을 것만 같이 그의 잔잔하던 눈빛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를 본 이회옥은 굳이 숨기고 자시고 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예! 어르신의 염려 덕분에 연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오! 정,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십이성 대성을 이루었습니다.”
“허허허! 천지신명의 보살핌이 있은 것이네. 아암! 그렇고 말고…. 이제 우리 선무곡을 위하여 애를 좀 써주시게나.”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화담은 정확히 무엇을 연성 하였느냐고 묻지 않았고, 이회옥 역시 무엇을 익혔는지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둘은 서로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기라도 한다는 듯 마주보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허허! 고맙네. 그나저나 이 늙은이에게 자네가 익힌 것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하하! 물론입니다. 어르신 잠깐 물러나 계셔야겠습니다.”

“물러서? 좋네, 얼마나 물러나야 하는가?”
“음! 한 이십 장쯤은 물러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어라? 이십 장이나…? 으음! 알겠네.”

화담은 이회옥이 왜 이십 장이나 물러서라는지 알 수 없었지만 토를 달지 않고 물러갔다.

한편, 이회옥은 숨을 고르면서 두 발을 정(丁) 자 모양으로 디디고는 천천히 품속의 제왕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천중(天中)을 향하도록 치켜들면서 이십여 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고목을 바라보았다. 이 상태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만빙심법의 구결을 되뇌였다.

그러자 바람도 불지 않건만 주위의 공기가 급격하게 그의 신형으로 쏠렸다. 이와 동시에 나직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챠아압! 만빙검(萬氷劍)!”
쐐에에에에엑! 쓔아아아아앙! 고오오오오! 휘이이이익! 챠르르르르륵! 피유우우우우웅!
퍼퍽! 퍼퍼퍼퍼퍼퍽! 투투투투툭! 피픽! 피피피피픽!

제왕비가 고목을 겨냥하자 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이내 허연 기류가 폭사(暴射)되어갔고, 동시에 허공을 찢어발길 듯한 파공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렸다.

어찌 보면 한 겨울에 이는 삭풍에 백설이 난분분(亂紛紛)하게 흩날리는 것 같기도 하였고, 어찌 보면 봄바람에 활짝 피었던 벚꽃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 순간 화담은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회오리치는 희뿌연 기류 때문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던 것이다.

잠시 후 희뿌연 기류가 사라지고 난 뒤 고목을 바라본 화담의 입에서는 연신 탄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세, 세상에 이럴 수가…! 어떻게 세상에…!”

푸른 잎이 무수히 달려 있던 고목은 꽁꽁 얼어붙은 듯 하얗게 변해 있었고 위에서부터 천천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이회옥이 들고 있던 제왕비는 언뜻 보면 장신구라 할 만큼 작은 크기이다. 그것에서 도강(刀罡)이 뿜어져 나온 것도 아니고, 어검술(馭劍術) 같은 무공을 펼친 것도 아니다.

온 세상을 꽁꽁 얼려버릴 듯한 냉기를 동반한 도강은 없으며, 그런 어검술도 있다는 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 자네 대체 무엇을 얻은 것인가?”

화담은 자신의 짐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엄청난 무공을 보고 대경실색하고 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침착을 잃고 더듬기까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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