뜯겨진 콩 순의 진실, "도대체 누구야?"

시원한 냉 콩국수 한그릇 말아드세요

등록 2003.07.18 10:37수정 2003.07.19 12:1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 홀어머니 두고 시집 가던 날..."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칠갑산>이라는 노래지요.


노랫말처럼 콩밭 매는 일은 옷이 흠뻑 젖을 만큼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그늘도 제대로 지지 않는, 그래서 뙤약볕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김을 매야 하는 콩 농사는 시골 아낙네들의 설움이고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잘 자란 콩 밭
잘 자란 콩 밭최성수
작년 봄, 저는 보리소골 손바닥만한 밭에 콩을 몇 골 심었습니다. 지금은 고3인 큰 아이와 함께 비닐을 씌운 밭에 일정한 구멍을 뚫고, 한 구멍에 두세 알씩 콩을 심었습니다.

"아빠, 이 콩알이 자라서 정말 콩이 많이 열릴까요?"

난생 처음 곡식 씨앗을 심어보는 큰 아들 녀석은 미심쩍다는 듯, 그런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만 내려가는 얼치기 농사라 심어 놓고는 가꾸고 돌볼 틈도 없었습니다.

"까짓것, 벌레 먹으면 먹는 대로 키우면 되지. 벌레도 먹고 사람도 먹고…."


오이나 배추에 벌레가 생겼다며 안타까워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런 말을 하며, 아내에게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이나 고추는 심고 나서 줄도 매주고, 모종 아래의 곁가지를 따주는 등의 일을 해야 했지만, 콩은 심은 대로 그냥 두었습니다. 그래도 콩은 심은 그대로 싹을 틔워 잘 자랐습니다.

"아빠, 콩 잘 자라지요? 그 콩 수확해서 콩국수 해 먹을 수 있을까요?"


입시 공부 때문에 시골집에 갈 시간이 없었던 큰 아이는 콩 얘기를 몇 번 했습니다. 콩을 심고 얼마 지나자, 콩 잎이 제법 실하게 올라왔습니다. 새 생명이 자라는 것처럼 마음 그득하고 기쁜 일이 또 있을까요? 우리 부부는 그런 콩잎을 만져보고, 쓸어보고 하며 어서 자라 콩꼬투리가 가득 열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말이었습니다. 고향 집에 내려가는 즉시 밭으로 달려가 콩을 살폈는데, 아뿔싸! 누가 그랬는지 잘 돋아난 콩의 윗 순을 또옥또옥 잘라 버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누가 그랬을까요? 어쩌지요, 아까워서. 이제 콩 농사는 글렀네."

아내가 안타까운 마음을 그런 소리로 드러냈습니다. 나도 마음 한 켠이 무너져내린 것 같은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돋아난 콩 순은 거의 다 잘려진 채였습니다. 제 순을 잃어버리고 곁가지로 또 다른 잎을 피워 올리고 있는 콩 나무는 제 마음처럼 쓸쓸해 보였습니다.

물에 불린 콩
물에 불린 콩최성수
그날 저녁, 윗 골짜기에 계신 아버지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런 저런 말 끝에 아버지께 콩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습니다.

"누가 콩 순을 다 잘라갔어요."

제 말에 아버지는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콩 순을 누가 잘라갔겠니. 그걸 어디다 쓰겠다고?"
"그럼 왜 콩 순이 다 잘라져 있지요?"

의아해 하는 제게 아버지는 이런 설명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내가 가 보니 노루가 콩 순을 잘라 먹었더라. 노루란 놈이 연한 풀은 기가 막히게 잘 아는 법이거든. 콩 잎이 맛도 좋으니 내려와서 다 잘라 먹은 거지."

아버지 말씀처럼, 보리소골에는 노루나 멧돼지 같은 짐승들이 많습니다. 고라니도 가끔 눈에 띄고요. 지난 겨울에는 눈 덮인 집 뒤의 밭길을 늦둥이 진형이 녀석과 산책하다가 고라니와 정면으로 마주친 적도 있습니다.

"어? 저게 뭐야?"

늦둥이 녀석은 깜짝 놀라 제게 돌아섰는데, 고라니도 놀랐는지 정신 없이 산 속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럼 콩 거두기는 다 틀렸네요."

내가 아버지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아버지는 다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원래 노지에 그냥 심은 콩은 순이 잘리면 잘 안 되는데, 비닐을 씌운 것은 순을 잘라주는 게 더 잘 자란단다. 비닐에 심은 것은 콩이 웃자라거든. 그래서 일부러 순을 따주기도 하는데, 노루가 그 일을 다 해준 셈이니 잘 됐지."

아버지 말씀대로, 작년 콩 수확은 제법 짭짤했습니다. 팔 것이 아니니, 수입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몇 골 안 심은 콩인데도 거의 한 포대가 다 될 정도였습니다. 그 콩을 거두고, 털고, 썩거나 잘못된 것은 골라내고, 말리고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는 즐거운 마음이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보리소골 밭에 콩을 심었습니다. 작년보다 조금 더 심었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노루란 놈이 콩 순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는 서로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 웃음은 '올해 콩 농사도 잘 될 거야'라는 의미였습니다.

작년에 수확한 콩으로 엊그제 우리 가족은 콩국수를 해 먹었습니다. 한창 더운 날씨에 시원한 냉 콩국수 한 그릇은 그 더위를 씻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더구나 그 콩국수는 바로 우리가 농사 지은 콩으로 만든 것이니까요.

시원한 콩국수에 소금을 곁들이면 고소하기 그지 없다
시원한 콩국수에 소금을 곁들이면 고소하기 그지 없다최성수
아내는 콩을 불리고, 일일이 콩 껍질을 벗겨내고, 삶아 갈아내면서도 내내 즐겁게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얼음을 둥둥 띄운 콩국물에 국수를 말아 넣고, 송송 썰어놓은 오이채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습니다. 역시 콩국수는 소금 간이 제격이지요. 그냥은 심심하던 콩국물도 소금을 적당량 넣으면 금방 구수한 맛이 살아납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두 그릇씩 콩국수를 먹었습니다. 늦둥이 진형이 녀석도, 고3인 큰 녀석도 국물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마시고는 배를 두드렸습니다.

"우와, 이 콩국수 정말 맛있다아."

진형이 녀석은 대접을 들어 조금 남은 국물을 들이마시고는 입맛을 다시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올해도 콩이 잘 열리겠지요?"

입시 때문에 보리소골에 몇 번 가보지 못한 큰 녀석도 그런 말로 기대를 내비쳤습니다.

"나 일기 써야 돼요. 그림 일기."

상을 치우고 나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공책을 가져다 상 위에 펴 놓고는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녀석이 공책을 제게 가져다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저녁에 콩국수를 먹었다. 이 콩은 아빠가 농사지으신 콩이다. 이 콩국수는 엄마가 만들어주신 콩국수다. 정말 맜있었다."

그런 내용을 괴발개발 적고, 국수가 담긴 대접을 그려 놓았습니다. 아내와 큰 아이가 삐뚤빼뚤 써 놓은 늦둥이의 글을 보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아빠가 농사지으신 콩이라고? 그건 노루가 농사지은 콩이지."

내 말에 늦둥이 녀석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아내와 큰 아이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 시원하고 맛있는 콩국수로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올 가을에도 노루 덕분에 많은 콩을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내년 여름에 또 노루 이야기를 하며 콩국수를 말아 먹는 날이 있겠지요. 더위를 다 식혀주는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수 말입니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