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89

장일정 제왕비를 얻다. (6)

등록 2003.07.21 13:30수정 2003.07.2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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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앞으로 이 탕약은 드시면 안 되겠습니다."
"무어라? 그걸 못 먹게 하라고?"

철기린은 장일정의 태도가 다소 방자하게 느껴져 못 마땅하였다. 이런 판국에 방주인 속명신수가 처방한 탕약까지 못 먹게 하라고 하자 괘씸하게 느껴졌다.


의원들이란 종종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하여 일부러 병세를 키운다고 한다. 그러다 극에 달했을 때 한번에 치료를 하면 실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다른 의원의 처방에 트집을 잡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의 실력이 상대적으로 더 뛰어난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런다는 것이다.

철기린은 너무도 사랑하는 빙기선녀가 혼절한 판국에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하여 수를 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놈이 어디에서 감히…?'


슬그머니 노화가 치솟은 철기린이 또 한번 헛소리를 하면 아예 일장에 박살낼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장일정이 입을 열었다.

"방주가 이 탕약을 처방하신 지 얼마나 되었는지요?"
"으음! 대략 달포쯤 되었어요."


지금껏 말없이 시립해 있던 시비의 말에 장일정과 철기린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 동안 이 탕약을 얼마나 드셨소이까?"
"저어… 사실, 약 드시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셔서…"

"무어라? 그럼 그동안 약을 제대로 들지 않았다는 말이냐?"
"죄, 죄송하옵니다."

철기린의 말에 시비는 죽을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숙였다.

"휴우! 다행이오. 그래, 얼마나 드셨소?"

철기린이야 화를 내든 말든 장일정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어… 저어… 저어…!"

시비는 자칫 처벌이라도 받을까 두려워 그러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낭자, 약은 안 먹었어도 괜찮소. 그러니 그동안 얼마나 드셨는지만 말씀하시오."
"죄, 죄송합니다. 열흘 전부터는 입에도 안 대시겠다고 하셔서 할 수 없이 쇤네가…"
"무어라? 네가 약을 다 먹었다고…? 이런…!"

철기린은 너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하하! 지난 열흘 간 약을 전혀 안 드셨다고 하시었소?"

장일정은 철기린이야 화를 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음까지 지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하하! 참으로 다행이오."
"무어라…? 이놈! 다행은 무슨 다행? 환자가 약을 안 먹었다는데 다행…? 이놈이 지금 어디에서…?"

철기린의 언성은 조금 전과 달리 올라갔다. 드디어 노화가 터진 것이다. 그러나 장일정은 웃고 있는 표정을 바꿀 의사가 없다는 듯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아씨께서 약을 안 드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놈! 네가 지금 본좌 앞에서 의술을 뽐내려 하느냐?"

"예에? 아, 아닙니다. 소생이 어찌…?"
"그런데 어찌 이리도 방약무인하단 말이더냐?"
"……!"

불같이 분노한 철기린의 태도에 장일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혈질인 성격을 지닌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는 맞부딪치기보다 한 호흡 정도 시간을 두고 대응하는 것이 좋다.

이러면 상대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슬며시 바라보니 여전히 화가 난 상태이기는 하지만 철기린의 표정이 약간은 누그러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약을 복용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를 설명해라. 만일 본좌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네놈을 능지처참에 처할 것이다."

화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철기린의 음성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조금 점 얼마나 화가 났었는지 짐작할 만하였다.

이에 장일정은 웃음기를 지우고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빙기선녀가 혼절한 것은 탕약을 복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명신수가 처방한 화제는 소갈병 중 소중을 다스리고자 할 때 사용되는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이었다.

여기까지는 전혀 이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약을 안 먹은 게 다행이라는 것은 백선(白鮮)이라는 약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낙태, 통경, 두통, 풍질, 황달, 중풍, 산유, 이뇨를 위해 처방할 때 사용되는 약재이다.

보름 전 속명신수가 정기 검진을 왔을 때 빙기선녀는 두통을 호소하였다. 그렇기에 화제(和劑 :처방)에 백선을 추가한 것이다.

철기린은 빙기선녀가 회임을 하였으며, 탕약을 복용하지 않은 덕에 낙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식이 있을 법한 데 아무런 소식도 없어 애가 타던 중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부원주님! 감축드려요."
"하하! 감축은 무슨… 다, 낭자가 애써준 덕이오. 하하, 그게 마음에 드시오? 그렇다면 낭자가 가지시오."
"어머! 아니에요."

유심선자 남궁혜는 부드럽게 쓰다듬던 호피(虎皮)에서 얼른 손을 떼었다. 그것은 차기 무림천자성의 성주가 될 철기린 구신혁이 하사한 백호피였다.

오늘 장일정은 두 가지 물건을 하사 받았다.

하나는 호피이고, 다른 하나는 손잡이에 붉은 보석이 박혀 있는 제왕비라는 물건이었다.

조금 전 그는 방주 집무실에 들렸다. 그리고는 하사 받은 물건을 보여주었다. 부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의원들은 선물 받거나 하사 받은 물건을 공개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피를 본 속명신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여러 번 받은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왕비를 보는 순간은 달랐다.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만큼 창백해졌던 것이다.

그것은 장일정이 자신들의 상관이 분명하건만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하던 내원 소속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왕비를 하사 받았다 함은 철기린이 무림천자성의 성주가 되는 날 무천의방 방주에 취임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니 안색이 돌변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장일정이 방주가 되면 현재 내원 소속 의원들은 외원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시절은 다 가는 것이다.

때마다 수뇌부 등으로부터 보내오는 하사품과 맛좋은 음식, 그리고 품격 높은 차 대신 피고름이 줄줄 흐르는 환자를 상대하느라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시절이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안색이 변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그래서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태도를 바꾸며 알랑방귀까지 뀌는 자도 있었다.

이 순간까지 장일정은 제왕비가 지닌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철기린의 총애를 받고 있는 빙기선녀 사지약을 몹쓸 병마로부터 구해낸 것에 대한 상(償)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이날 무천의방으로 하나의 교지(敎旨)가 당도하였다.

장차 무림천자성의 성주부인이 될 빙기선녀 사지약의 주치의를 속명신수에서 소화타로 바꾼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이 당도하였을 때 장일정은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속명신수 등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무천의방의 실세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날 그 동안 장일정에게 못된 짓을 자행하였던 내원 소속 의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짐을 꾸렸다. 이들의 공통점은 장일정에게 악랄한 장난질을 한 자들이었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보복이 두려웠기에 짐은 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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