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중학교 교가남중학교 홈피
"너거들은 참말로 운도 좋다카이. 시험도 안 치고 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있으이 말이다."
"그라이 언가(형)들도 쪼매만 더 있다가 태어났으모 좋았을 꺼 아이가."
"얄마야! 그기 오데(어디) 내 맘대로 되는 기가?"
1972년 봄, 나는 우리 마을에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남면중학교(현재 남중학교)에 입학했다. 시험도 치르지 않고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던 그해부터 전국의 모든 중학교에 무시험제 입학이 실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마을 형들 말마따나 우리들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입학시험을 치렀으니까. 게다가 시험에서 떨어지는 형들도 제법 많았다. 그런 형들은 대부분 재수를 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래서 농사가 짓기 싫었던 형들은 국민학교 6학년 때부터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마디미(상남면)에 있는 유일한 중학교였다. 또한 남녀공학이었다. 그래서 마디미 일대에 유일하게 있었던 상남국민학교를 졸업한 가시나 머스마들은 누구나 싫든 좋든 남면중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정형편으로 입학조차 하지도 못하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남면중학교는 학교 구조가 조금 특이했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 동서로 야트막한 산이 하나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야산의 남쪽 교실에서는 남학생들이 공부를 했고, 야산 너머 북쪽 교실에서는 여학생들이 공부를 했다. 하지만 교무실은 그 야산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어서 선생님들은 남북의 교실을 골고루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마디미 일대의 가시나 머스마들은 학교만 같은 중학교를 다녔을 뿐, 교내에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칠 기회조차 거의 없었다. 등하교길에도 신작로를 중심으로 가시나들은 오른쪽으로, 머스마들은 왼쪽으로 다녔다. 교문도 달랐다. 그러니까 말만 남녀공학이었지, 각각 독립된 중학교처럼 보였다는 그 말이다.
"니 요새도 가시나 그거 가끔 보제?"
"요새는 코빼기도 보기 에렵다(어렵다) 아이가. 근데 와?"
"아...아이다."
"니 내 눈은 못 속인다. 그 가시나 그거 좋아하제?"
"그기 아이라캐도."
"일마 이기요. 대가리에 소똥도 안 벗겨진 기 벌시로 연애질로 할라카나. 그라다가 들키모 우째 되는 줄 아나? 무기정학 아이모 바로 퇴학이다."
그때 우리들의 얼굴에는 제법 여드름이 듬성듬성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 아래도 어른들처럼 제법 거무스럼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와 단짝이었던 애가 현식이(가명)었다. 당시 현식이는 우리 마을에 사는 가시나 하나 때문에 공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다. 현식이의 소원은 그 가시나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