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말고 순수한 건 없다'

<그녀에게>(Talk to Her) O.S.T.

등록 2003.07.21 17:57수정 2003.07.2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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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녀에게>(Talk to Her) O.S.T.

<그녀에게>(Talk to Her) O.S.T. ⓒ 배성록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의 2002년작 <그녀에게>(Hable con ella)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명하다. 모든 요점은, 극의 맨 마지막 부분, 그러니까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 역)가 죽고 난 뒤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마주르카 포고' 공연에서 만난 마르꼬(다리오 그란디네티 역)와 카테리나(제랄딘 채플린 역)의 대화 속에 함축되어 있다.

퍼포먼스를 보며 눈물 짓던 마르꼬는 우연히 마주친 카테리나에게 "(죽은 베니그노는)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카테리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답한다. "순수한 건 없어요. 순수한 건 예술 뿐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구원에 관한 영화다. 그 '순수'한 예술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지를, 피나 바우쉬의 무용과 무성영화 등의 온갖 장치를 동원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그녀에게>다. 뇌사 상태에서 깨어난 알리샤(레오노르 와틀링 역)가 공연장에서 '마주르카 포고'를 보며 눈물 흘리는 마르꼬를 보고 관심을 표하는 것은, 수미쌍관이랄까,

영화 첫 부분에 마르꼬와 베니그노가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 공연에서 조우하던 장면을 상기하게 한다. 이어지는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앞 자리의 마르꼬는 뒷자리에 앉은 알리샤를 바라본다. 깨어나 제 2의 삶을 살아갈 알리샤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띄운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나 바우쉬 무용의 시퀀스. 베니그노와 리디아는 죽었지만, 마르꼬와 알리샤는 앞으로도 살아나가야 할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 교환은 베니그노와 리디아의 흔적을 관객에게 상기시키며, 동시에 화면을 가득 메우는 '마주르카 포고'의 의미에 집중하게 한다. 앞으로도 살아나가야 할 사람들, 그들에게 구원은 예술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베니그노가 알리샤를 구원한 것도, 리디아가 마르꼬를 구원한 것도 아니며, 살아남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순수'한 예술 뿐이다. 그래서 또다시 <그녀에게>는 구원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예술'의 구원에 음악이 빠질 도리가 없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등에서 꾸준히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함께 작업해 온 알베르또 이글레시아스(Alberto Iglesias)는 <그녀에게>의 사운드 트랙을 통해 절정에 달한 음악적 역량을 선보인다. 일견 이 영화의 음악들은 영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영상을 압도하는 예술적 탁월함을 구현하고 있다.

스페인 전통 음악에서부터, 플라멩꼬, 재즈, 룸바에 이르기까지 온갖 양식이 동원된다. 또한 스페인 전통 음계를 현악 4중주의 단아한 구성 속에 녹여 낸 몇몇 오리지널 스코어는 레이첼스(The Rachel's) 따위는 어찌 되어도 좋을 만큼 격조있고 아름답다.


여기에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까에따노 벨로조(Caetano Veloso)의 명곡 'Cucurrucucu Paloma'일 것이다. 까에따노 벨로조는 영화 속에서 직접 공연 장면에 출연했는데, 그의 노래를 듣다 눈물을 흘리는 마르꼬의 모습은 환상적인 음악에 동화된 관객과 완벽하게 감정 이입한다. 마치 인간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벨로조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마르꼬의 심경과도 또한 완벽하게 일치를 이루며, 때문에 한줄기 눈물을 통한 감정의 표출은 결코 값싸거나 천박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는 그 '예술'이 카테리나의 말처럼 '순수' 그 자체인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리라.

이처럼 <그녀에게>의 사운드 트랙은 격조높은 영화의 예술성에 더없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며, 사운드 트랙 그 자체로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고급스러운 향취의 오리지널 스코어, 무성영화 시퀀스에서의 아름다운 4중주, 엘리스 레지나(Elis Regina)의 "Por Toda a Minha Vida" 등 적절한 선곡. 음악을 통해, 영화의 메시지는 다시 한번 간명하게 드러난다. 예술말고 순수한 것 없다는. 그것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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