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좋은 점을 기억해!"

영화 속의 노년(56) : 〈아빠를 업고 학교에 가다〉

등록 2003.07.21 20:00수정 2003.07.2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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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생 중 둘째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유난히 많이 울었다. 잠도 푹 자지 않고, 젖도 배불리 먹는 것 같지 않고, 그저 틈만 나면 울어대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아이를 포대기로 들쳐 업은 것은 아이가 태어난 지 정확히 4주가 되던 날이었다. 얼마나 고생스러웠는지 지금도 허리만 조금 아프면 '너 낳고 4주만에 등에 업어서 엄마 허리 아프다'고 한 마디 하곤 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슬며시 생각한다. 나도 어려서 유난히 엄마 등에서 안 떨어졌다고 하던데….

내가 마지막으로 엄마 등에 업혔던 것이 언제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거의 업혀본 적 없는 아버지의 등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식구들이 다같이 친척집에 다녀오던 늦은 밤, 버스 안에서 곯아떨어진 나를 등에 업은 것은 아버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이 맞는다면 빼빼 마르고 몸피가 작았던 엄마는 아무리 꼬마였어도 나를 도저히 업으실 수 없었으리라.


학교를 가려면 걸어서 강을 건너야만 하는 마을에 일곱 살 짜리 석와는 살고 있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 밑에서 누나와 함께 사는데, 어찌나 가난한지 아버지는 두 아이 모두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작은 프라이팬을 돌려 학교에 갈 사람을 정하는 것. 그 사람의 운수(運數)에 맡기는 가장 공평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친 누나는 중학교에 갈 수 없었고, 프라이팬의 손잡이가 정해준대로 석와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아빠는 처음 학교에 가는 날 석와에게 당부한다. 더러워지면 안되니까 동네를 벗어나면 신발을 벗어서 들고 가다가 학교에 도착해서 다시 신으라고. 지우개 사줄 돈이 없으니까 공책에 글씨 잘 쓰라고….

쏟아지는 비로 강물이 불어난 어느 날, 비닐 한 장 뒤집어쓰고 강을 건너던 석와는 같은 반 여자아이가 순식간에 강물에 떠내려간 것을 보게 된다. 석와는 이제 도저히 강을 건널 수 없다. 석와가 사흘 동안 학교에 결석한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석와를 무섭게 때린다. 다시 학교에 가려고 강물에 들어섰으나 건널 수 없는 석와. 아버지는 석와에게 등을 들이미신다. 그러면서 하루도 거르지 말고 날마다 그리고 끝까지 공부하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와 누나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등록금을 제 때 낼 수가 없지만, 그래도 석와는 공부를 잘해 식구들에게 기쁨을 주고 자랑이 된다. 시간이 흘러 누나는 돈 때문에 떠밀려 시집을 가고, 석와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화학올림피아드에 나가 지역 1등을 차지한다. 사범 고등학교에 합격을 한 석와, 그러나 때맞춰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신다. 왼쪽을 못쓰게 되면서 누군가 돌봐드리지 않으면 살아가실 수 없게 된 것이다.

고민하는 석와. 아버지는 시집간 딸에게도 석와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빈민구호소행을 결심한다. 그러면서 영화는 석와의 고등학교 진학 포기와 아버지의 자살 결심, 석와의 아버지 구출 등으로 이어진다. 결국 석와는 학교 근처에 방을 얻고 아버지를 모시고 가기로 한다. 그 옛날 아버지가 자기를 업어서 건네주었던 강을 이제 아버지를 등에 업고 건너는 석와. 한데 엉켜 강을 건너는 두 사람 앞의 강물에는 아침 햇살이 소리 없이 퍼지고 있었다.


가난이 어찌나 뿌리 깊은지 쉬지 않고 일을 해도 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 가난을 대물림해주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들을 공부시켜야 했고, 아들은 빤히 살림살이를 알면서도 공부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나는 설사 프라이팬 손잡이가 자기 앞에 멈추어 섰다 할지라도 자신은 공부를 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너무 가난해서.

어르신들 가운데 특히 할머니들은 배움에 대한 한이 깊으시다. 오빠나 남동생의 공부를 위해 물러서야 했던 기억을 가지신 분들이 많고, '내가 더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는데…'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하신다. 그러면서도 '그 때는 다 그랬지 뭐' 하시며 툭툭 털어 내고 웃기도 하신다. 그 자리에는 늘 쓸쓸함이 남는다. 할머니들은 영화 속 석와의 누나 같다.


학교에 갔으면 자기보다 공부를 더 잘 했을 누나를, 학교에 보내주지도 않고 일만 시킨 아빠가 밉다는 동생에게 누나는 타이른다. "아빠의 좋은 점을 기억해!" 시집가기 전에 등록금을 마련해 찾아온 누나가 동생에게 남긴 말이다. 부모의 좋은 점만 기억하는 자녀가 얼마나 될까. 나쁜 점만 헤집고 또 헤집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 아닐지.

이웃 사람들에게서 아버지가 빈민 구호소로 가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달려온 석와. 석와는 그럴 수 없다며 문을 두드리며 울고, 아버지는 걸어 잠근 문 안에서 역시 운다. 문을 사이에 두고 우는 부자(父子). 가난은 구겨진 합격 통지서처럼 너무도 초라하게 저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태어나 4주만에 내 등에 업혔던 둘째는 초등학교 4학년. 아무리 응석을 부려도 도저히 업어줄 수 없는 키와 몸무게를 자랑하고 있다. 나를 초등학교 3학년 때 마지막으로 업어주셨던 81세의 아버지는 지금 척추 뼈가 내려앉았다는 '척추간협착증' 진단을 받고 수술 날짜를 기다리고 계신다.

평생 그 어디에도 비빌 언덕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자식들 길러내시고 이제 아픈 허리에 굽은 등으로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아버지를 모시고 가겠노라며 등에 업고 강을 건너는 석와. 그 열 여섯 작은아이는 내 아이를 업기에도 힘이 부치고, 아버지를 내 등에 업을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 마흔 넷 아줌마를 숙연하게 그리고 슬프게 만들며 자기는 눈부신 아침 햇살 쪽으로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리고 있다.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을 얻지 못했던 어린 날. 때로는 상상 속에서, 때로는 남몰래 그려보는 그림 속에서 밖에는 그것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가지지 못한 것보다는 가진 것을 돌아볼 줄 알게 된 것은 역시 나이듦의 선물. 치마꼬리 잡고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에게도, 등 굽은 아버지에게도 필요한 순간이 오면 기꺼이 등을 들이밀어 보리라 결심해 본다. 석와 누나의 당부는 오늘 내게도 역시 유효하다. "아빠의 좋은 점을 기억해!"

(아빠를 업고 학교에 가다 Going to School with Dad on my Back, 1998 / 감독 주우조, 출연 조강, 강화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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