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하소연 들어주는 게 약"

건약 광전지부, 곡성 오지마을 10년째 순회진료 펼쳐

등록 2003.07.22 19:13수정 2003.11.2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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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을 주민이 부황을 뜨고 있다. 대부분 허리나 근육 통증을 호소한다.

마을 주민이 부황을 뜨고 있다. 대부분 허리나 근육 통증을 호소한다. ⓒ 오마이뉴스 이국언

"할머니. 이 심장 약은 밥 먹기 전에 드시고, 이것은 머리 아픈데 말고, 이런데, 어깨 아플 때 드시는 약인데, 아프실 때만 한번씩 드세요. 이것은 식사하시고 조금 있다가 드시는 겁니다. 아시겠죠?"


오후부터 먹구름이 검게 뒤덮더니만 끝내 소낙비가 한바탕 몰아치는 지난 19일 저녁. 전남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 노인정이 모처럼 사람 훈기로 가득 찼다.

이날은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광주전남지부'(이하 건약광전지부)와 '곡성군농민회'가 함께 주최해 매달 오지마을을 찾아 펼치고 있는 순회진료가 있는 날. 무료진료가 있다는 마을 이장의 스피커 방송이 이미 아침저녁으로 몇 차례나 나간 뒤다.

굳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인정은 상담을 기다리는 아주머니 할머니들로 한 방 가득하고, 한쪽에선 침을 맞고 또 허리에 부황을 뜨느라 정신이 없다.

"젊었을 때는 담박질도 잘하고 다릿심 하나는 좋았는데, 하우스 일하면서 다 베레(버려) 부렀그만. 일을 소랍게(수월하게) 하면 조깐 괜찮고, 되게 하면 도로 아프고…. 광주 가서 치료도 다 해봤는데 인자는(이제는) 고지도 안 듣고(미덥지 않고)…."

임복순(66)씨는 양쪽 무릎을 펴 보이며 아픈 부위를 애써 짚었다. 1200여 평의 하우스에 수박농사만 8년여 지었다는 임씨는 "몇 차례 침도 맞아 봤지만 효험이 없다"며 "촌에서는 일 안하고는 못 살다 보니 그것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약 먹으나 안 먹으나 그 팔짝" 농민들 통증에 시달려

손등에 침을 맞고 있는 손영희(70)씨는 "작년 11월 풍으로 떨어진 뒤 광주 큰 병원에 6개월이나 다녔지만 통 안 듣는다"며 "손가락에 힘이 없다보니 젓가락질이 힘들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손씨는 "사진 다 찍어보고 약을 먹어봐도 매 한가지다"며 "한약으로 70만원이나 써 봤지만 먹으나 안 먹으나 그 팔짝"이라고 체념하듯 말했다.


a 모처럼 명절처럼 방 안 가득하다. 약사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는 모습. 손에는 진료카드가 쥐어있다.

모처럼 명절처럼 방 안 가득하다. 약사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쓰는 모습. 손에는 진료카드가 쥐어있다. ⓒ 이국언

농민들이 주로 불편을 호소하는 질병은 관절염이나 근육통. 고된 노동 때문이다. 약사들은 약을 처방하면서도 중간 중간에 간단한 요가 시범을 보이거나 혼자서도 부황 뜨는 요령을 일러주고 있었다.

관절염은 약을 복용한다고 낫는 병도 아니고, 속이 쓰려 오래 복용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또 시골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나 풀을 알려줘 병원을 찾지 않고도 민간요법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아주기도 한다.

곡성지역 순회진료단 활동이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곡성농민회가 의료환경이 빈약한 농촌지역 주민들을 위해 건약 광전지부의 손을 빌면서부터다. 처음엔 봄과 가을 한해 두 차례로 시작된 농촌 보건활동은 지난 2000년 가을부터 매달 한차례로 늘려 진행돼 오고 있다.

진료는 통상 저녁시간을 이용해 이뤄진다. 약사들이 근무를 서둘러 마치고 달려온 시간이기도 하고,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그 날 일손을 접고 저녁 참을 끝낸 시간이기도 하다. 늦을 경우 밤 12시까지 진료가 이어질 때도 있다고 한다.

준비도 만만치 않다. 한약이나 양약 종류만도 300여 가지에 이르고 여기에 부황기나 침이나 뜸을 놓는 기구, 혈당이나 혈압을 체크하는 기계가 따른다. 매달 적지 않은 약값이 부담이 되기도 하는데,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고 있다고 한다.

"약 값이 얼마다요?"

순회진료를 하다보면 가지가지 순박한 농촌인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어떤 할머니는 의료보험증을 손에 쥐고 오는 분이 있는가 하면, 약값이 얼마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진료가 끝나면 음료나 직접 기른 과일이 놓이기도 한다.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보니 약사들의 세심함도 눈에 띈다. 구분이 쉽게 약 봉투에 약 이름을 써 주기도 하고, 글을 모르는 분들한테는 동그라미 세모로 약을 구분해 주기도 한다.

a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 손목이 불편한지 뒤집어 보며 증상을 설명한다.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 손목이 불편한지 뒤집어 보며 증상을 설명한다. ⓒ 이국언

그러나 이런 약이 농민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어쩌면 농민들에겐 힘겨운 농촌생활을 이어가는 그들의 심리적 상처와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라도 더 정성껏 듣고 나누려 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90여호 되는 주산리 마을에서 이날 진료를 받은 사람은 26명 가량. 비가 온 탓인지 마을 규모에 비해서는 다소 적은 편에 속한다. 혼자 사시는 노인 분들이 많이 못 왔다고 한다.

홍인표(53)씨는 "농촌을 무시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 오히려 더 크다"며 "막막한 소식만 듣고 있자니 병이 더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은하(36) 약사는 "혼자 사시는 노인들이 밥맛이 없어 제대로 드시지 못하고 있는 게 제일 안타깝다"며 "노인정 같은데 모여 밥 한끼라도 같이 할 수 있도록 해 사는 낙을 찾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농민 보면 우리 자신 돌아봐 지기도"

그동안 순회진료를 통해 찾아간 곡성 오지마을은 100여곳 남짓. 순회진료를 통해 농민회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겸면과 죽곡면 지회가 건설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순회활동을 하는 도중 첫 눈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농민들에게 얼마나 보탬이 되기야 하겠습니까. 흙과 함께 땀흘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초창기부터 보건활동에 참여해 온 박희정(40) 약사는 "인생얘기를 나누다 보면 농민들을 통해 노동의 건강함을 배운다"며 "사는 모습만 봐도 큰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약 한번 먹는 것으로 어떻게 치료되겠습니까. 의사한테 다 못한 것 속 시원히 말하고 어렵고 갑갑한 현실을 위안 받는 것이 가장 큰 힘이죠"

박웅두 곡성농민회 부회장은 "농민들 얘기를 들어주는 것 자체가 힘"이라며 이날 순회진료의 의미를 덧붙이고 있었다.

a 안방에서 밀려난 남자들이 처마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길어진 장마에 밭작물도 재미를 못 보고 출하를 앞둔 포도 값도 걱정이라고 한다.

안방에서 밀려난 남자들이 처마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길어진 장마에 밭작물도 재미를 못 보고 출하를 앞둔 포도 값도 걱정이라고 한다. ⓒ 오마이뉴스 이국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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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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