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식물원과 오대산 여행

시원한 여름 땀맛!

등록 2003.07.23 14:39수정 2003.07.23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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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두두…’
벌써 시간이 되었나? 더위와 모기 때문에 몸둘 바를 몰라 앉았다 누웠다 밤새 잠을 못잤는데. 월요일이라 그런지 진부행 버스는 한산하다. 혼자 옆자리까지 꿰차고 밤에 못다 이룬 숙면의 시간으로 스르르.

진부에서 상원사행 버스로 갈아타고 15분 정도면 오대산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앞, 식물원 가는 길이 나온다. 차가 있다면 식물원 앞까지 바로 갈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내리쬐는 여름 햇빛과 맞짱도 뜨고, 맑고 시원한 물소리와 나무그늘의 응원도 받아가며 20여분 정도 걸어야한다.

예전에 남산 식물원과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에 단체관람으로 한번씩 가본 적이 있지만 오늘처럼 스스로 식물원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제 아침 경복궁 국립박물관 뒤뜰을 산책하다 20여종의 꽃과 나무로 아담하게 꾸며진 정원을 보고 갑자기 내린 결정이지만 삭막한 교도소에서 국화꽃, 산국꽃 몇송이로 야초차를 탐닉했다던 황대권님의 ‘야생초 편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쁜 새색시같은 산수국을 보며 이쁘다를 연발하는 여학생들, 열심히 아이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엄마 그리고 나로써는 부럽기만 한 몇 쌍의 연인, 모두 식물원이 제공하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우리 꽃과 나무로 조성된 길을 걷고 있다.

실내전시장에 있는 조경소재관과 분경분화관에는 작지만 아름다운 우리꽃들이 아담하게 전시되어 있고 밖으로 나오면 넓고 길게 뻗은 재배단지가 나온다.

원추리, 벌개미취, 부처꽃 등 많은 우리 꽃이 가득하다. 특유의 향이 백리를 간다고 해서 지어진 섬백리향에는 얼마나 많은 벌들이 벅적거리는지 가까이 가기가 겁날 정도다.

마치 섬백리향 무리가 들썩들썩 어깨춤을 추는 것 같다. 날씬한 줄기에 둥글게 돌려난 잎과 하늘 향해 활짝 핀 붉은 꽃, 하늘말나리는 초록색 발레복을 입은 붉은 얼굴의 소녀같다.

아침 햇빛과 함께 피고 저녁놀과 함께 진다는 수련의 연못엔 개구리와 올챙이가 게으른 헤엄으로 평화로움을 과시하고 있다.

"올챙이가 커서 나중에 개구리가 되는거야."

"나도 알아, 알아."

옆에서 어린 아들에게 개구리의 성장을 설명하던 아빠는 결국 아들에게 핀잔만 듣는다. 하지만 책이나 비디오를 통해서만 접했을 아이의 생태지식이 이렇게 한 번 찾는 것에 비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는 게으른 걸음이 가장 적당한 행위이다. 우리가 흔히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온 꽃, 나무의 이름을 서둘 것 없이 하나하나 부르면 소박한 기쁨이 생긴다.

이제 산이나 국도변 어느 곳에서의 걸음도 무뚝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인사도 나누게 될 것이다. 김춘수 님의 시 '꽃'에서처럼.

식물원입구에서 잠시 꺼두었던 핸드폰을 켰더니 1시간 40여분이 지났다. 이제는 산행이다. 자가용을 얻어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오대산 상원사(현존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동종인 '상원사 동종'으로 유명) 입구에 내려 감자떡 몇 개로 허기를 달래고 산에 오르기 시작.

산길을 오르면서 조금전 식물원에서 보았던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떠오르는 것도 생각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조금씩 알게될 것이다.

후끈한 땀이 등줄기를 타내린다. 잠시 목을 축이느라 쓰러진 나무에 앉아있으려니 앞에서 옆에서 다람쥐들이 튀어나와 힐끔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사라진다.

오대산 정상 비로봉은 1시간 20분정도면 오를수 있다. 비로봉에서 멀리 산아래를 관망하려던 생각은 자욱한 안개 때문에 어쩔수 없었지만 안개를 두른 산의 운치도 보아줄 만하다.

상원봉으로 가는 능선길에선 잡목으로 우거져 반바지 차림이라면 연약한 피부를 긁힐 수도 있다. 갑자기 내린 소낙비로 옷이 조금 젖었지만 덕분에 내 몸은 해갈된 논밭 같다.

세 시간 반만에 다시 상원사입구로 돌아와 땀을 씻고 아래위 옷 한 벌을 갈아입었더니 기분이 무척 좋다.

큰나무 그늘 아래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나는 무척 평온하다. 오늘 하루 피로했지만 우리 꽃과 나무를 좀더 가까이 만날 수 있었던 식물원과 울창한 숲에서 후끈한 여름 땀맛을 느낄 수 있었던 오대산 산행 덕분이다.

집에서 선풍기나 에어콘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수박을 입에 넣는 것처럼 시원한 여름이 어디있을까 하지만 여름 더위 속에서 활짝 필 우리 자생식물을 만나고 산행으로 땀 한번 실컷 흘리면서 여름다운 여름을 맛보는 것 또한 시원한 여름나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다짐해본다. 벌개미취가 만개할 8월, 이곳을 다시 찾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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