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 그의 '좌익 알레르기'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홍성식
좌·우익의 구별이 한국사회처럼 명확한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가 지향했던 사상이 그 아들과 손자에게까지 멍에로 지워지는 불합리가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불과 얼마 전까지 공공연히 존재했던 한국.
휴전선이 그어진 1953년 이후 남한사회에서 '사회주의자의 아들'로 지목된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인 동시에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원죄였다.
한국전쟁 전 예비검속에 걸려 총살되거나 납북 혹은, 자진월북한 사람의 자식들이 겪은 고초는 끔찍했다. 하긴, 해방 후 한국사란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탄압'에 다름 아니지 않던가.
초등학교 때다. 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놀러갔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외조모에게 옛날이야기를 해달라 떼를 썼다. 그날 외조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자는 아직 기억한다.
'전쟁이 났다카는 거만 들었제, 어데 땅이나 파묵고 사는 우리가 뭐를 아나. 그란데 어느날엔가 동네에 국군이 들어왔는기라. 하이고, 어찌나 가시나들을 히야까시(희롱)하고 밭이고, 과수원이고 디비고 댕기면서 아무거나 지껏처럼 쳐 묵는지 무슨 화적떼가 따로 없는기라.'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후 외조모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는, "지금부텀 하는 이바구는 어데가서 말하면 안된데이"라는 다짐을 수 차례나 못박고서야 말을 이었다.
'국군이 나가고 얼마 안돼 인민군인가 카는 빨갱이들이 들어왔는데, 갸들은 안 그라더라꼬. 일단 아줌마고 처녀고 가시나들한테는 말을 안 걸고, 찬밥 한 숟가락 얻어묵고는 미안타카면서 미숫가리 비슷한 것을 내놓더라고. 빨갱이라꼬 다 나쁜놈들은 아인 모양이라.'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 한국사회가 무서웠다. 집안을 통틀어봐야 과격한 빨갱이는 고사하고, 수동적인 부역자 하나 없는 외가. 그럼에도 외조모는 겨우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코흘리개 손자의 입단속까지 해야했다. '레드 콤플렉스'의 공포는 평생을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온 일자무식의 일흔살 시골 할머니에게까지 그 맹위를 떨쳤던 것이다.
부악문원에서 이문열과 폭탄주를 마시다
지난해 7월쯤 우연한 계기로 소설가 이문열(56)이 작업실로 쓰는 경기도 이천의 부악문원을 다녀온 적이 있다.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그의 이념과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건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인간생활의 근간이 됐던 '전통시대로의 복귀'와 별스럽게 느껴질 만큼 유별난 '좌익 알레르기'.
2002년 7월은 이른바 '노풍'이 거세던 시기였고,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싸고 이문열과 민주당 추미애 의원간에 벌어진 가시 돋친 설전의 여파가 아직 가라앉지 않았던 때였다. 게다가 당시 이문열은 "안티조선은 친북세력"이라는 토론회에서의 발언으로 안티조선측으로부터 고소까지 당한 상태였다.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은 상황임에도 이문열은 자신에게 비우호적인 기사를 쓴 매체의 기자가 두 명이나 낀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고 예를 갖춰 대접했다. 땀을 식히라며 시원한 국물의 평양식 냉면을 내왔고, 족히 200평은 넘어 보이는 잔디 파릇파릇한 정원에서 바비큐를 구웠다.
서울에서의 선약 탓에 손님들을 자신의 서재에서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던지 밤에는 안동소주와 맥주를 가져다 직접 폭탄주를 제조해 돌리기도 했다. 새벽까지 계속된 그 술자리의 안주들은 또 얼마나 정갈하고 맛깔스러웠던지.
거기에 더해 주석(酒席)이 파할 때까지 별 다른 말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다가 손님들의 잠자리를 살펴주고 나서야 남편과 함께 안채로 돌아가는 이문열 아내의 태도는 요새 보기 드문 것이라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나도 저런 아내를 얻고싶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날 우리 일행과 이문열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갓 동아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소설 <초한지>에 관해 이런저런 견해를 주고받았고, 인터넷문화의 효용성과 폐해에 대해서도 한참이나 설전을 벌였다. 도하 일간지를 시끄럽게 했던 '이문열 책 반환운동'과 당시 한국사람 모두의 관심사이던 12월 대통령선거 또한 도마 위에 올렸음은 불문가지.
안동소주 20%와 맥주 80%의 비율로 제조한 폭탄주가 한 사람 당 10잔쯤은 돌았으니, 모두는 너나 없이 취해갔고, 취한 후에는 맨정신으론 말하기가 껄끄러운 이야기들도 거침없이 토로했다.
그날 이문열은 장인의 좌익전력과 노사모의 공격성 등을 이유로 들어 "나는 노풍이 반갑지 않다"라고 말했고,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주류가 된다면 나는 여기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라는 걱정을 전하기도 했다.
이윽고, 모두가 만취한 새벽. 이문열은 "내가 쓴 칼럼(언론없는 정부를 원하나)이 그리 때려죽일 만큼 잘못된 겁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대통령선거 결과가 여의치 않으면 프랑스로 망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이민을 가겠다는 건가요"라고 재차 물었고, 이문열은 "이민이야 자기가 좋아서 가는 거고, 핍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거라면 그건 망명이겠지요"라고 부연까지 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문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이문열돕기운동본부=노사모=안티조선'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돌아가며 노래까지 한 곡씩 불렀던 그 술자리.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정치적 담론까지 온갖 이야기들이 오갔던 그 자리에서 단 하나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영국유학을 다녀와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월북한 이문열의 아버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문열은 물론, 우리 일행 또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것은 아직도 상존하는 어떤 금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을지.
이념이 인간을 탄압하는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
전날의 폭음으로 인해 거북한 속을 쓸어 내리며 서울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기자는 이 대명천지 21세기에도 금기의 언어가 있음을 실감하며 문득 쓸쓸해졌다. 그것은 이문열의 '좌익 알레르기'를 이해하는 한 단초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로 인해 겪은 고통을 이제는 끝내고싶다'는 과도한 자의식이 이문열을 우익 이데올로그로 만든 것은 아닐지.
부친이 남로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을 지낸 소설가 김원일은 아버지가 월북한 후 어머니, 동생들과 함께 시장통에서 사과껍질을 주워먹으며 처참한 유년을 보내야했다. 이미 작가로 일가를 이룬 김원일이지만 그는 아직도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걸 극도로 꺼린다.
얼마 전 타계한 소설가 이문구와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역시 '좌익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평생 지고 살았다. 남로당 충남도당 조직책이었던 둘의 아버지는 예비검속에 걸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념이 뭔지 사상이 뭔지 아무 것도 몰랐던 유년시절 겪은 아버지의 죽음.
오죽하면, 이문구는 '우익문인의 대표격인 김동리의 문하에 들어가 개죽음만은 피하고자 했다'고 고백했겠는가. 또 "내 아버지는 당대의 이상주의자이고,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까지 김성동이 겪었던 몸과 마음의 상처는 어떠했을까?
이문열의 가슴에 분명 담겨있을 사회주의자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애증(愛憎). 그는 아버지(사회주의)와의 완벽한 절연을 통해 자신을 옭아맸던 고통의 사슬을 끊고자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진보세력(사회주의 정권이 아님에도)의 집권이 곧바로 자신을 탄압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에 '프랑스망명'이라는 극단의 방법까지 강구하지 않았을까.
슬픈 일이다. 아직도 횡행하는 '이념에 의한 인간탄압'의 공포. 이문열은 그 공포의 희생양이 아닐지. 어떤 위대한 이념도 인간을 박해하는 도구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또한, 생각과 지향의 차이가 그 사람을 차별하는 수단이 돼서도 안 된다. 그 차별은 폭력에 다름 아니기에.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기자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우익이 좌익을 탄압하는 것은 물론, 좌익에 의한 우익탄압도 용서되지 않는 사회. 비단 기자의 바람만은 아닌 이 꿈은 언제쯤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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