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오릿대(짐대)를 세우는 장사섭 할아버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사람이야기 13 -진안군 부귀면 두남리 두봉(斗峰)마을

등록 2003.07.28 08:29수정 2003.07.2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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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오릿대를 세우는 장사섭 할아버지

부귀 원두 남짐대
부귀 원두 남짐대이상훈
원두남 마을에 가면 오릿대(짐대)를 세우는 분이 계신다. 그분은 장사섭 할아버지이다. 두봉 마을은 본래 마을입구, 들판 한가운데, 현재 탑이 있는 위치 등 3곳에 1년에 한 번씩 오릿대를 세웠다고 한다. 마을에 오릿대가 있어야 마을이 좋다고 하여 세웠다고 한다.

오릿대를 세우지 않은 후부터 마을에서 젊은 사람들이 죽는 등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장사섭 할아버지가 개인적으로 집 뒤에 약 20년 전부터 매년 1기씩 오릿대를 세우고 있다. 개인적으로 세우기는 하지만 이는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두봉 마을은 원두남 마을과 삼봉마을로 구성

두봉은 본래 진안군 삼북면의 지역으로서 매남이 또는 두남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정리, 회구룡 등을 병합하여 두남리라 해서 부귀면에 편입되었다. 두남리는 두봉(원두남, 삼봉리), 회신(회구룡, 신기, 독정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두남 마을은 약 350여 년 전 김해 김씨, 인동 장씨 등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한다. 현재는 35호로 구성되어 있다. 매남(梅南)이라 부르다가 현재는 원두남이라 불린다.

마을 뒤에 응봉(鷹峯)이 있는데 이곳을 ‘매봉재’라 칭한다. 여기에서 ‘매’는 새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매응(鷹)자의 ‘매’가 매화매(梅)자로 변화되어 매남(梅南)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원두남에서 말두(斗)는 우두머리를 일컫는데 말두(斗)는 머리두(頭)와 같은 의미로 주변이 높다는 의미이다.

마을은 풍수상 배형국이어서 돛대 역할을 하는 오릿대를 세웠다고 하며 이와 관련하여 삼봉마을 오른쪽으로 배바우와 배 메는 곳이 있다. 한지골(대곡)의 조낙주 선생님은 원두남 마을은 매화낙지(梅花落地) 형국이라고 한다. 원두남과 삼봉 사이에는 ‘섬뜸’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원두남 마을은 주산인 부귀산(806m)줄기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뻗어내려 방향을 바꾸어 북서쪽으로 뻗어내린 매봉산 줄기 아래에 마을이 자리 잡았다. 마을 앞으로는 정자천(程子川) 흐르고 회구룡 마을 뒷산이 안산 역할을 한다. 삼봉 마을은 원두남 마을 동쪽에 위치해 있다.

원두남 마을입구에는 1959년에 세운 김효자 현응 기적비, 효자 김해 김재황 기적비가 있다. 시 같은 해에 세워진 해산거사 김용섭 기공비 등이 세워져 있다.

원두남 마을 돌탑은 왼쪽 산날망에 1기가 있다. 음력 정월 열 나흗날 밤 7∼8시경에 탑제를 모신다. 제주는 생기를 맞추어 돌아가면서 지내다가 요사이 13년 전부터는 현영기(58세)씨가 맡아서 모신다. 그래서 풍물을 치고 난 뒤 모은 돈 70만원을 기금에서 나온 이자로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예전에는 모든 제물을 장만했으나 지금은 삼색실과, 떡, 포 등을 준비한다. 축문을 읽고 각 호마다 소지를 올린다. 제주, 축관 등이 제에 참여한다.

당산(堂山) 축문(祝文)

삼천지(三天地) 금궐(金闕)이요, 하복(下伏)은 곤륜산(崑崙山)이요, 수지조종(水地祖宗)은 황해수(黃海水)로 백두산(白頭山) 영봉(靈峰)은 국가(國家)의 조종산(祖宗山)이고, 장백산(長白山)을 연하야 태백산(太白山)을 노야, 소백산맥(小白山脈)에 덕유산(德裕山)을 태조봉(太祖(峰)으로 정하니, 만인가화(萬人可化) 법도로다.


진안군(鎭安郡)에 부귀산(富貴山)을 중조봉(中祖峯)으로 정하니, 두남리(斗南里) 매봉산(梅峯山)을 소조봉(小祖峯)을 정하야, 이초초래용(離超超來龍)에 당산봉(堂山峯) 입수(入首)하야 차당산(次堂山)을 설립하야 지성(至誠)불공(佛供)하야 지운(地運)정기(精氣) 지기운(地氣運)을 명기(名氣)명기(名氣) 대명기(大名氣)로 조화(造化)화로다. 인명(人命)과 신명(神命)은 화우동심(和祐同心)하여 성불성사(誠佛成事)로다. 여래불(如來佛) 여래불(如來佛)

마을 앞 천변 앞으로 마을 숲이 형성되어 있다. 수종은 느티나무가 대부분이다. 마을의 수구막이 역할을 한다. 두남리 앞길이 본래 전주∼용담간 도로였는데 이 구간에 천변을 따라 숲이 조성되어 있었다.

삼봉 마을은 전주 이씨, 은진 송씨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현재 가구 수는 11호이다. 주위 산이 시루봉(문필봉, 필봉), 매봉, 장봉 등 세 봉우리가 있어 삼봉(三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봉 마을 입구에는 느티나무로 마을 숲이 형성되어 있고 그 안에 돌탑 1기가 있다. 바로 옆에는 모정이 있다.

탑에 금줄을 치고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탑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마을 숲이 있는 제일 큰 나무에도 제를 지냈다.

제주는 깨끗한 사람으로 정하는데 마을사람이 돌아가면서 제주를 맡는다. 제주 맡을 사람이 혹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다음 차례 사람이 제주를 맡는다.

비용은 동네땅, 기금에서 나온 기금으로 충당한다. 떡, 명태 술 등을 준비하며 축문은 따로 없고 각 호마다 소지를 올린다.

두봉 마을은 효자가 나온 마을답게 자부심이 대단하며 비록 개인적이지만 마을의 평안을 위하여 오릿대를 세우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정 넘치는 곳이다. 장사섭 할아버지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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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북 전주고에서 한국사를 담당하는 교사입니다. 저는 대학때 부터 지금까지 민속과 풍수에 관심을 갖고 전북지역 마을 곳 곳을 답사하고 틈틈히 내용을 정히라여 97년에는<우리얼굴>이란 책을 낸 바 있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전북지역의문화지인 <전북 문화저널> 편집위원을 몇년간 활동한 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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