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럼 이만 노부는… 이제부턴 진아와 상의하게. 허허! 제세활빈단을 구워먹든 삶아 먹든 이제부턴 자네의 의지대로 하게. 허험! 허허험! 날씨 한번 좋구나."
말을 마친 화담은 기분이 좋다는 듯 헛기침 몇 번을 하는가 싶더니 총총히 전각 밖으로 향하였다.
"……!"
이회옥은 밖으로 향하는 화담을 보면서 내심 착잡했다. 말은 편하게 하였지만 단주직이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호호호!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홍 낭자, 아니 군사! 사실 적지 않게 부담이 되오. 소생은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누구를 이끌어 본 적이 없소. 또한 살인이라는 것도 해본 적이 없소. 그런데 어찌 소생더러 이렇듯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라 하시는지…"
이회옥은 솔직한 심정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잠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홍여진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악인록이 완성된 것은 얼마 안 된 일이에요. 소녀가 그것을 옮겨 적기는 하였으나 아직 진위를 파악하지는 못했어요."
"……!"
"할아버님의 말씀대로 악인록에 기록된 대로라면 죽어 마땅하지요. 하지만 사실을 확인해 보면 혹시 개과천선할 수 있는 인물들도 조금은 있을 거예요."
이회옥은 홍여진의 말에 답답했던 가슴이 약간 풀리는 듯하였다. 생각보다 덜 죽여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림천자성은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사실 단주께서 연공하는 동안 무림에 큰일이 있었어요."
"큰일…? 무슨 큰일이오?"
"무림천자성과 소림사가 월빙보를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일이 벌어졌어요."
"뭐라고요? 무림천자성과 소림사가…? 정말이오?"
이회옥의 놀라는 표정을 본 홍여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이에요.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요. 그 중에는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보주인 흑염수사 후세인과 그의 두 아들은 행방불명이 되었고요. 그리고 월빙보의 모든 금광은 무림천자성이 접수해버렸지요."
"으으음…! 헌데, 무슨 명목으로 공격한 것이오?"
"아부가문의 금금존자 오사마를 지원했다는 것과 대량살상병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했어요."
"진짜 그런 병장기가 있었소?"
"물론 없었지요. 이번 침공은 무림천자성이 월빙보의 금광을 빼앗기 위한 수작이었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요."
"으으음…!"
전쟁이 벌어지면 참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내들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아무 죄도 없으며 힘도 없는 노약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이런 생각에 나직이 침음성을 토한 것이다.
"공격을 하기 전, 무림천자성은 월빙보로 하여금 대량살상병기가 있는지 없는지 조사를 받으라고 강요했어요. 만일 이를 거부하면 즉각 공격하겠다고 위협을 했지요."
"으음! 그래서 월빙보에서는 어떻게 하였소?"
"별 수 있나요? 무림천자성의 공격에 견뎌낼 수 없다 판단한 흑염수사는 치욕스럽지만 보주 집무실까지 수색하도록 내버려두었고, 그의 아들은 악랄한 위력을 지닌 병장기들을 해체하였지요. 사실상 무장해제를 한 거지요."
"그런데도 공격하였단 말이오?"
"그래요. 그러니 문제지요. 상대를 완전히 무장해제 시켜놓고 대완구와 무적검으로 중무장한 정의수호대원들로 하여금 전격적으로 공격하게 하였지요."
"이런 날강도 같은…!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이회옥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 뒷말을 잇지도 못했다.
무림천자성이 강호의 정의를 구현한답시고 깡패 짓을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처럼 후안무치한 짓을 드러내놓고 자행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호제일 방파이니 그만한 체면을 지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무기를 내려놓으면 살려주겠다고 해놓고서 막상 무기를 내려놓으니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사람을 공격하여 숨통을 끊은 것과 다름없는 짓을 자행한 것이다.
"놀랄 일이 또 하나 있어요."
"또 무슨 일이 있었소?"
"공격 개시 이후 신임 곡주인 일흔서생 노현이 무림천자성의 편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침공에 제자들을 파견하겠다고 하여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었지요."
"에이, 설마…? 무린천자성과의 친분을 중요시하던 청죽수사라면 모를까… 일흔서생은 분타지위 협정서도 공평하게 개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분이 아니시오? 그런 분이 어찌…?"
이회옥은 홍여진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하였기에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일흔서생은 절대 그럴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제세활빈단도 이번 처사에 크게 놀랐으며, 크게 실망했어요. 그래서 원래 수립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하였지요."
"뭐요? 그럼 방금 한 말이 사실이란 말이오?"
이회옥은 너무도 진지한 홍여진의 태도에 경악하였다.
"그래요. 전에는 일흔서생이 새로 임명할 호법들과 힘을 합쳐 일을 도모하려 했어요. 그러나 일련의 상황으로 미루어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로 한 것이지요."
"정말 곡주께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다는 말씀이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회옥을 본 홍여진은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녀가 단주께 왜 허위보고를 하겠어요? 신임곡주는…"
홍여진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설명하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