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회귀의 신화>(이학사, 2003)이학사
이들은 다윈이즘(Darwinism)의 전폭적 세례를 받으며, 설정한 탐구 주제들의 결과물을 차곡차곡 쌓았다. 그 결과 이들은 애니미즘(animism), 프리애니미즘(pre-animism), 토템이즘(totemism)과 같은 여러 이론의 '성과'를 적잖게 올렸을 뿐더러, 이 이론들은 점점 주류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들은 적잖이 "서구우월적" 시각을 드러냈다. 다윈이즘의 진화론을 이용해 원시인들을 조사하면서 기본 가설로 "단계진화이론"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가설은 필연적으로 원시인들에 대한 폄하적 평가가 담겨 있었다.
초기인류학자와 고대인
"원시인"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미개인과 문명인, 야만인과 교양인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이 전제돼 있었다. 해서 이들은 원시인들의 관습이나 감정, 그리고 의식이 독특하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들의 의식이 계몽주의 시대의 문명인인 자신들 모습에 견줘 아주 '야만한' 종족임을 공공연히 얘기했다.
이에 대한 문제점이 예리하게 분석된 오늘날에도 '원시인=미개인'이라는 인식적 습관은 여전히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우리가 마치 동남아시아 외국인들을 비문명인이나 야만인처럼 대하듯이 말이다.
20세기 들어서 발전한 '역사주의'와 이에 따라형성된 역사주의 의식은 이런 도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가치있다고 여겼던 원시인들의 종교적 심성도 역사주의에 의해 처절하게 단죄되었다.
곧 헤겔 이후로 맑스주의에서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인 사건을 구해내려는, 역사적인 사건에 그 자체로서, 그 자체를 위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온갖 노력" 때문에 원시인들이 역사에 부여했던 '성(聖)'의 의미마저 그 효과를 상실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오늘 다시 원시인의 종교적 심성을 복권(復權)하며, 더 나아가 '역사적 인간'에서 초월 지향의 원시인과 같은 '전통적 인간'으로 되돌아 갈 것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엘리아데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고전으로 자리잡은 명저 <성(聖)과 속(俗)>에 잘 나타나 있다. 곧 일상성 속의 균질적(均質的) 장소와 시간, 공간 등을 성의 비균질적인 장소와 시간, 공간으로 질적인 변화를 시키는 성현(聖顯)의 개념을 통해 고대 심성의 회복을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엘리아데는 이러한 고대 심성의 회복을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일환으로 성찰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절박한 심정의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서구 지성사가 강요하는 역사주의에 맞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엘리아데는 "언제나 서구인들의 심성에 자리잡은 역사주의"를 마뜩지 않게 생각하면서 "고대 심성의 가치관"을 연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원시'나 '고대'라는 단어를 쓰면서 이 단어에 가치폄하적인 의미가 담긴 게 아니라고 애써 설명하는 것도 엘리아데와 같은 성찰 덕분이다.
역사주의와 고대인의 '복권'
그렇다면 역사주의가 도대체 뭐길래 엘리아데는 서구의 역사주의에 맞선 걸까. 1955년에 초판된 <영원회귀의 신화(The Myth of the Eternal Return)>(이학사, 2003)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서구의 역사주의 만을 다루진 않았다. 성현을 통한 "원형과 반복"과 "시간의 갱신"이란 주제도 꽤 심혈을 기울였다. 가령 엘리아데는 "원형과 반복"과 "시간의 갱신"이라는 주제를 통해 "구체적·역사적인 시간에 대한 전통 사회의 저항, 달리 말하면 기원의 신화적인 시간, 위대한 시간으로 주기적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전통 사회의 향수"를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주제보다도 엘리아데의 절박한 동기가 된 역사주의에 마음이 끌렸다. 서구인들이 종종 자신들의 상황을 "붙박이별의 상실"로 빗대어 표현한 '현대인'의 정황에 화두를 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선택적 감상을 한 셈이다. 물론 실제 내용은 "원형과 반복", "시간의 갱신"과 "역사주의"가 연속성을 띠기 때문에 연관성을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 여하간 엘리아데는 역사주의에 대해 적절한 통찰을 던져 준다.
먼저 엘리아데에 따르면 '현대인'이란, "절대적으로 역사적이고자 하는 인간, 무엇보다도 역사주의, 맑스주의, 그리고 실존주의의 인간"인데 그렇다고 "모든 현대인들이 자신을 그러한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역사적 인간이 어떻게 "역사의 폭압" 또는 "시간의 폭압"을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역사의 폭압이 무엇인지 대강의 구도를 잡을 수 있게 해준다.
"단지 역사의 도정에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단지 팽창 일로에 있는 제국의 이웃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고통을 겪거나 죽어가는 수많은 민족들의 그 고통과 죽음은 어떻게 허용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예컨대 유럽의 동남부 지역은 아시아인 침략자들의 침입로에 있었고 후에는 오토만 제국의 이웃지역이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여러 세기 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