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계절에 '반 통의 물'을 드립니다

독서이야기(6) <반통의 물>

등록 2003.07.31 18:53수정 2003.07.3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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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통의 물>의 표지
<반통의 물>의 표지창작과 비평사
오늘은 시인 나희덕의 산문집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반 통의 물'이란 제목을 보고는 아무런 이미지도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되새기다 보면, 그녀가 밭을 가꿀 때처럼 '마음 한쪽이 절뚝거리면서도, 남은 반 통의 물을 살아 있는 것들에게 쏟아 붓고 싶어하는' 그녀의 간절하면서도 겸손한 글 쓰기를 만날 수 있어요.


모두 4부로 나누어진 단락은 '순간들, 나무들, 사람들, 질문들'로 구성됩니다. 그녀의 개인적인 생활사를 통해 한 인간이 맺는 가족과 사회, 시대와의 소통을 면면히 살펴 볼 수 있답니다.

'가자미와 신호등과 칫솔과 유리조각'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단상들이 인상적입니다. 만학의 꿈을 이루게 된 아내의 희끗한 머리를, 남편이 아내가 잠든 사이에 염색을 해놓은 일은 굳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오래된 사랑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정경이었지요.

'오래된 내복처럼'은 함께 늙어가기 시작한 존재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내복이 주는 쓸쓸함과 동질감으로 애틋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속도, 그 수레바퀴 밑에서'는 현대성이 가지는 위기감과 절박함에 대한 경고를 인도 기행을 통해 알려주지요. "또렷하게 그어진 중앙선과 차선, 신호등.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안전장치들이 위험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둔화시키며 무한 속도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예요.

'이 때늦은 질문'에서는 90년대의 문학을 작가 나름대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당대'란 말에 오랫동안 주눅들어온 시대, 강력한 중심이 사라진 주변적 가치의 시대, 결코 하나의 답을 이끌어 내지 않는, 강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대라고 말하지요.


그녀의 눈길을 뭉뚱그려 '여린 것에 대한 연민'이라고 단정지어 봅니다. 생명에 대한 따뜻한 감각이든, 고통과 분열에 대한 치열하고도 내밀한 밀도감이든, 생활인으로서의 존재방식이든, 그녀의 근원적인 자아는 조금은 어스름하지만 따뜻한 방으로 인식되지요.

그녀에게는 어둠조차도 소멸에 이르는 공포를 동반한다기보다 '다가올 어둠을 잠시 유예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힘' 또는 '어둠의 시작인 아름다운 일몰'로 그려집니다.


단정한 목소리로 면밀하고 깊이 있게 그려내는 그녀의 사소한 일상들을 통해 인생이라는 잡힐 것 같으면서도 좀체 알 길 없는 '어쩔 수 없는 힘'을 느낌표와 물음표를 번갈아 가며 읽게 됩니다.

반통의 물

나희덕 지음,
창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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