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복 입고 여름을 보내는 사람들

[현장] 영하 15도의 냉동얼음공장

등록 2003.08.01 16:35수정 2003.08.0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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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투명한 유리컵에 냉수를 담아 얼음을 띄운다. 물에 녹아들며 새는 얼음의 숨소리가 더위에 막힌 숨통을 녹여낸다. 불쾌지수로 늘어진 혀에 서늘한 얼음이 스며드는 순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단박에 씹어먹을지 천천히 녹여먹을지 고를 틈도 없이 혀에 닿은 얼음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계절. 톡 쏘는 맥주, 달콤한 팥빙수, 얼얼한 수박화채와 사람이 그리운 요즘 만약 얼음이 없다면 우리의 여름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다른 이들의 시원한 여름을 책임지기 위해 방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싸늘한 여름을 보내는 곳이 있다. 서울 연희동에 위치한 서강냉동얼음공장은 에어컨은 고사하고 그 흔한 선풍기 하나 없이 여름을 보내고 있다.

급증한 매출로 고단함도 잊은 채 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시린 손발을 불어가며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극심한 온도차에 처음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X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를 치르며 통과의례를 거친다.

얼음의 단위는 '각' 으로 표현하며 한 각은 135Kg에 달한다. 5월부터 시작해 한참 성수기에 접어든 요즘 식용 얼음을 생산하는 이 공장은 하루에 150-200각 정도를 만들어낸다. 가공되지 않은 큰 관빙은 먹기 좋게 3cm로 규격 된 큐빅으로 잘라져 소비자들과 만난다.


얼음은 그 사용 목적과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빙수에 쓰이는 셰이브드 아이스(Shaved Ice), 세이크에 들어가는 크랙키드 아이스(Cracked Ice), 냉면에 넣는 조각 얼음 크러시드 아이스(Crushed Ice), 술에 낭만을 더하는 큐브 아이스(Cube Ice), 덩어리 얼음인 럼프 아이스(Rump Ice), 1Kg이상의 큰 얼음인 블록 오브 아이스(Block of Ice)등이 있다.

얼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크게 입수, 냉동, 탈빙으로 나뉜다. 식용 얼음을 만들기에 정수 된 수돗물을 쓰고 얼음에 공기를 넣어 다 얼을때까지 계속 불순물을 걸러준다. 가공을 마치지 않은 큰 관빙엔 가운데 부분이 텅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공기가 불순물을 걸러주었던 흔적이 남은 것이다.


김진석
입수된 물은 24-36시간 동안 영하7도~9도의 온도로 얼려진다. 급냉을 시킬 경우엔 영하15도 가까이 내려 얼리기도 한다. 질 좋은 얼음을 얻기 위해선 입수 후 공기를 통한 불순물 제거도 중요하지만 오랫동안 천천히 얼리는 것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급냉시킨 것보다는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얼린 것이 더 늦게 녹고 쉽게 부서지지 않는 좋은 얼음이 된다.

냉동 과정을 마친 얼음은 20~22도 되는 물에 담겨 같이 얼려 있던 그릇(캔)과 박리 되어 한 각으로 태어난다. 대략 8000원정도 하는 한 각이 겨울에 이르면 3000원으로 떨어지고 매출 또한 삼분의 일로 감소한다. 이렇 듯 가공되지 않은 큰 관빙으론 승산을 볼 수 없는 현재이기에 얼음 제조업체는 얼음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가지 가공 방법을 개발중에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큐빅 모양에 맞춰 잘라진 얼음을 들 수 있겠다. 큐빅 모양의 얼음은 76년부터 이태원에서 칵테일 같은 술에 넣으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만 해도 얼음을 먹기 좋게 자르는 가공 작업이 사람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낯선 문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요즘은 얼음이 단순한 식용을 넘어 많게는 원가보다 20배 이상 되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예술 도구로 쓰이고 있다. 이젠 어느 연회석이든 얼음으로 만든 조각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와 만나지 못한 얼음은 저빙고에 보관된다. 사람이 들어와 작업 할 때는 영하10도까지 온도를 높이지만 평소엔 영하20도를 꾸준히 유지한다.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방한복으로 무장을 하고 여러 겹의 장갑을 껴도 30분 이상 일하지 못한다.

어느 새 일하다 보면 입이 굳어져 나중엔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라고 한다. 안에서 30분 일하고 밖에 나와 30분간 쉬며 다른 일을 돌보곤 한다.

김진석
"밖에 나와 여름 햇빛을 받을 때면 차라리 일할 때가 더 그립다" 고 너스레를 떠는 원용손(61)씨는 "처음엔 기온 적응이 안돼 감기에 걸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면역이 생겨 웬만해선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고 흐뭇해 했다.

원씨는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방편으로 얼음이 들어간 찬 음식을 먹으라고 추천한 동시에 또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어 탈날 것을 우려해 적당히 먹을 것을 당부했다.

이인복(30)씨는 "무더운 날씨에 땀흘리며 일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며 "무엇보다 여름에 일하고 싶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고 말했다. 더운 곳에서 고생하는 친구들이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는 그는 일을 마쳤을 때 느껴지는 후련함과 상쾌함이 정말 좋다고 덧붙였다.

불과 10년 전 여름만해도 얼음부족으로 파동이 일어 얼음 공장 직원들은 여름 휴가를 보내는 다른 이들을 구경만 했다. 그러나 냉장고가 보급되고 새로운 얼음 문화로 인해 많은 공장들이 생기면서 화려한 매출을 선보였던 그 시절은 이제 까마득한 과거가 되었다.

땡볕에 울렁이며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대신 발그레한 수박과 얼음 조각이 동동 떠다니는 수박화채를 상상해 보자.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인정까지 양념으로 곁들인다면 금상첨화. 굳이 큰 돈 들여 멀리 피서를 떠나지 않더라도 올 여름 작은 얼음 조각과 함께 행복해지는 방법은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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