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몽돌 해수욕장안병기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조병화 시 '추억' 전문)
고등학교 시절 난 도서관에서 틈만 나면 두보, 이백, 백거이 등의 당시(唐詩)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무료해지면 슬그머니 도서관 서가에서 시집을 찾아 읽기도 했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조병화의 '추억'이라는 시였다.
개펄처럼 질척거리는 우울한 사춘기 소년의 감성에 딱 들어맞는 이 시를 난 시도 때도 없이 외고 다니다가 무언가 허전한 느낌에 젖어들곤 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시 속 화자에게 사랑의 썰물이 닥쳐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의 사랑에 끝맺음 없는 긴 여운을 남겨두고 싶어했다.
나는 짧게 시의 끝 부분을 덧댔다. 그래도 기다리고는 싶어서! 그 짧은 덧붙임으로 해서 조병화 시인의 시는 나의 추억이 되었다. 아무튼 조병화의 '추억'이 내가 맨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바다와 사랑에 대한 시였다.
불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물은 사람을 뿔뿔히 흩어지게 한다. 그리고 바다와 항구는 이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늘은 조병화의 추억 대신 정양 시인의 '토막말'이란 시를 대신 읽는다.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정양 시 '토막말' 전문)
모든 사랑은 바닷가에 와서 제 끝을 들여다 보려 하는가. 어쩌면 사랑의 속성이 상대에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다는 막막함과 절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 역시 가을 바닷가에다 누군가 써놓고 간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이란 낙서가 잉태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 연을 더욱 더 생동감을 있게 만드는 것은 '씨펄'이라는 욕이다. 이 상스럽기 짝이 없는 욕이 도리어 이 시에 고도의 진정성을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말이다. 욕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은 마침내 밀물에게마저 '무식한'이라는 형용사를 달 정도로 시인을 고양시키고야 만다.
내가 보기에 욕의 가장 큰 특징은 군더더기와 거짓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욕은 모든 논리를 일거에 쓰러뜨리고야마는 직관이 가진 진정한 힘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시는 그 한줄에서 끝나야 옳았다. 하여간 나는 이제 바닷가에 대한 또 한 편의 애송시를 얻었다. 저녁놀 대신 내가 진저리치며 이 한편의 시를 새겨 읽는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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