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말라"

백장청규(百丈淸規) 정신이 살이있는 절 부안 개암사

등록 2003.08.10 05:42수정 2003.09.0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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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서는 매미 우는 소리가 한낮의 적요를 깨트리고 있었다. 맴맴맴 우는 참매미와 쓰름쓰름 우는 쓰름매미가 다투어 울었다. 매미 울음 소리는 숫컷이 암컷을 유혹하는 소리라 한다. 그러나 땅 속에서 몇 해가 지나도록 애벌레로 지내다가 정작 성충이 되어서는 단 7일 밖에 살지 못하는 제 저 매미 부처가 오늘 길손인 내게 설(說)하는 것은 생의 유한함인지도 모른다.

양 쪽으로 전나무들이 줄지어 선 내소사 들머리와는 달리 개암사 들머리는 전나무들이 '한 피짝'에만 서 있다.한 200여 미터 쯤 걷자 문득 전나무 길이 끊어진다. 절대적 진리나 그 경지는 말이나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나는 지금 그 언어도단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처인 절집을 찾아가는 중이다. 전나무 길이 끝나는 곳에 개암사 부도밭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단풍나무들이 객(客)을 맞는다.


대웅전 부처님
대웅전 부처님안병기
평평한 냇돌이 촘촘히 박힌 길을 올라가다보면 돌축대와 돌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섰다. 뭉개구름이 낀 하늘과 그 아래 염소뿔처럼 솟아오른 울금바위가 두 눈을 가득 채운다. 나는 지금 1300년 백제 고찰인 능가산 개암사에 도착한 것이다. 개암사는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왕사였던 묘련 스님이 변한에 있던 궁궐을 고쳐 절로 바꾸면서 묘암의 궁궐을 묘암사, 개암의 궁궐을 개암사로 부른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돌계단을 올라서면 왼쪽에 아담한 조립식 건물이 있다. 죽염의 기원지로 이름난 개암사의 각종 죽염을 전시, 판매하는 곳이다. 죽염은 대나무속에 천일염을 넣고 황토로 입구를 막은 뒤 높은 열에 아홉 번을 구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천일염의 유해 성분이 걸러지기도 하고 대나무와 진흙의 기운이 소금에 배어 들어 사람에게 매우 유익하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책에선가 '시중에서 파는 소금엔 바지락이 죽어버리지만 죽염이나 천일염엔 바지락이 춤을 추며 놀더라'는 우스개 섞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 절에서 죽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그 역사가 꽤 오래 됐다고 한다. 일일불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백장선사의 가르침인 백장청규(百丈淸規) 정신이 여기 이르러 오롯히 꽃을 피웠던 것일까.

대웅보전 현판
대웅보전 현판안병기
개암사 대웅전 현판은 매우 작다. 이 절집엔 귀신들이 많이 나타났으므로 그 귀신들을 쫓기 위해서 도깨비상을 만들고, 도깨비상이 더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 현판의 크기를 줄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에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이다.건물 규모에 비해 우람한 민흘림 기둥이 안정감을 심어준다. 외부 단청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지워져 버렸는 데 그것이 오히려 대웅전의 인상을 정갈하게 보이게 한다.

대웅전 부처님 머리 위의 닫집
대웅전 부처님 머리 위의 닫집안병기
대웅전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엔 문수보살 우측엔 보현보살이 협시하고 있다.부처님 머리 위에는 정자형(丁字形) 구조로 되어있는 화려한 닫집이 있다. 닫집의 내부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 마리의 용과 안쪽 기둥의 끝에 있는 용두와 더불어 모두 다섯 개의 용이 구슬을 물고 있어 그 모습이 생생하다.


대웅전 문살
대웅전 문살안병기
4분합(四分閤)의 정자살 문은 내소사의 초화문 문살 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그래도 제법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대웅전을 물러나오면서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을 바라보았다. 적막을 깨트리는 풍경 소리가 듣고 싶어서 였다.하지만 오늘은 바람 조차도 선정(禪定)에 들어 어디선가 결가부좌를 틀고 앉았는지 감감 무소식이다. 이런 상태를 일러 '절 속 같다'라고 하는 것일 게다.

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좌상안병기
지장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장전은 중생구제의 원력을 세운 지장보살을 모신 곳이다. 지장전에 모셔진 석불좌상은 본디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청림사지에서 나온 불상을 옮겨온 것이라 한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오른손 위에 왼손을 포개어 엄지 손가락을 곧게 펴서 맞대고 있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는 보주를 감싸쥐고 있는 지장보살의 형상이 단아하면서도 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대웅전 전경
대웅전 전경안병기
절 마당으로 내려와 조금 떨어져 대웅전을 바라보니 구름낀 하늘과 바위를 두른 산과 절집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긴 받침목과 활주가 받쳐져 날아가는 새처럼 펼쳐진 추녀의 자태가 활달했다. 근래들어 개암사가 부처님 제자 16분을 모신 응진전과 지장전, 요사채 등 새 당우를 짓긴 했지만 아직은 절집이 가진 소박함을 잃지 않고 있음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한창인 절집을 떠났다. 80년대 민중가요 가수였던 범능 스님의 <딩동댕>이란 노래 한 자락이 마음을 휘감고 돌았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딩 동 댕 나는 어디로 가는가 딩 동 댕 새여 꽃이여 나무여 딩 동 댕/어느 하늘 아래 무슨 인연으로 우리는 잠시 태어나 음- 바람처럼 이슬처럼 사라지는가/(후렴) 딩동댕 딩동댕 딩동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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