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된 죽음의 언어들과의 대면

<기형도 전집> 한 예술가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책

등록 2003.08.14 12:35수정 2003.08.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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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 지성사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본문 중에서>



시인 기형도가 요절한지 10년이 지났다. 조용훈이 지은 <요절-왜 죽음은 그들을 유혹했을까>를 보면, 스스로 감당해낼 수 없는 광기와 예술혼, 그리고 치유 불가능한 고독이 젊은 예술가들의 요절을 불러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기형도의 시세계는 일부 비평가들에 의해서만 내면적이고 비의적이며 우화적인, 독특한 색채의 시인으로 평가받았을 뿐, 그의 생전에 독자들에게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 윤동주나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그를 비추는 조명은 그가 요절한 다음에야 다시 켜지기 시작했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라는 시로 등단하게 되면서 그의 내면이 가지고 있었던 고독한 심상과 몽환적인 이미저리는 한국 시의 새로운 경향으로 추대받을만큼의 폭발력으로 변화되었다.

그의 짦은 생애에 대한 기록을 담아 그와 친했던 성석제, 원재길 등 몇몇 지인들이 엮은 <기형도 전집>은 이러한 기형도의 내면세계를 한 곳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또한, 그의 유고집이 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 그리고 5주기가 되는 해에 나온 추모 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등 이미 나와 있는 세 권의 책을 한데 묶음으로써, 이후의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기형도 시인의 작품 세계에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시인이자 한 인간이었던 기형도는, 한없이 외로웠고 힘들었던 고독의 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번의 파지(破紙)를 내면서 써내려갔던 작가의 활자가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어지러운 시대에 그가 버팀목으로 삼고자 했었던 자연에 대한 사랑을 묘파한다.

길게만 느껴졌던 신춘문예 당선소식에 한없이 들뜬 마음으로 소감을 써내려간 기록이나, 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던 그의 짧은 단편들을 보노라면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작가로서의 불타는 열정도 함께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쓴 참회록에 “후회는, 오랜 시간의 결정 혹은 비슷한 결심이 순간적 충동에 의하여 그 시간적 경과를 쉽사리 부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 다시금 시간과 법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노라고 술회하고 있다. 그 구절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앞날을 미리 보기라도 한 듯 서늘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요절한 작가의 모든 글에서는 대개 그러하듯이 죽음을 나타내는 냄새가 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이 책에서 느껴야만 하는 것은 시인 기형도가 아니라 한 인간의 오감의 한계를 다시 한번 체득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한없는 후회와 좌절이 앞을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글을 쓰지 못하는 무력감이 육체에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예술가와의 대면은 다시 한 번 나를 채찍질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이다.

시인 기형도의 작품 세계

시인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 등에서 근무했다.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연세대 교내 문학 서클인 '연세 문학회'와 안양의 문학 동인 '수리'에 참여, 활발한 습작 및 시작 활동을 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연세대 신문인 <연세 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박영준 문학상'과 '윤동주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시인은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공식 데뷔하였다. 민중시, 노동시 등 투쟁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던 당시에 그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시세계를 다지는 작품들을 줄곧 발표했으나, 89년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유고집으로는 <입 속의 검은 잎>이 있다.

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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