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습고 감칠맛 나는 미숫가루 한 그릇 타 먹고...

[어릴 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10]미숫가루

등록 2003.08.14 13:37수정 2003.08.1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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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숫가루를 타서 먹었습니다. 영양도 많지만 살찔 염려도 없고 여러 곡식을 고루 먹으니 몸에도 좋습니다. 약간 푸르스름한 것은 검정콩이 조금 많이 들어 간 것과 쑥, 익모초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미숫가루를 타서 먹었습니다. 영양도 많지만 살찔 염려도 없고 여러 곡식을 고루 먹으니 몸에도 좋습니다. 약간 푸르스름한 것은 검정콩이 조금 많이 들어 간 것과 쑥, 익모초를 넣었기 때문입니다.김규환
해마다 보리타작이 끝나면 어머니는 바쁜 농사철인데도 짬을 내셨다. 보리 닷 되에 찹쌀, 멥쌀, 검정콩 각각 두 되씩 준비하신다. 영양 많은 율무 한 되, 수수, 조 반 되와 검정깨 세 홉도 어디다 *꼼쳐(‘꼼치다’, ‘꿍치다’는 ‘몰래 숨겨 놓다’의 전라도 사투리) 놓았는지 꺼내오신다.


갖가지 재료를 조리로 잘 일어 말리셨다. 나무로 불을 *‘싸게’(불기운이 세다는 뜻) 때서 볶으면 탈 염려가 있으므로 마른 짚 한 다발 가져다 불을 슬슬 때며 볶는다. 수수 빗자루 대용으로 짚 한 줌을 휘휘 젓다가 긴 주걱으로 밀어주며 볶으면 곡식마다 다른 고소한 향기가 부엌에 가득 찬다. 동네 어귀에 까지 냄새가 풍기니 놀다말고 집으로 돌아왔다. 불 때는 보조자는 나였다.

“엄니, 볶은 거 한 줌 먹어도 될랑가?”
“예 있다. 시방 묵고 살자고 헌거신디 한 줌이 문제냐?”
“참말로 꼬습네요. 엄니도 한 번 드셔보싯쇼.”
“엄마는 폴새(이미, 벌써) 묵어 봤단다.”
“이걸 볶으면 정때(점심때) 지나면 미숫가리 먹을 수 있겄제라?”
“하믄~”
“오늘 저녁엔 밥 안 묵고 미숫가루 실컷 먹을라요.”
“막둥이 아들이 먹는다는데 누가 머라 한다냐?”
“엄니 혼차(혼자) 가시면 무거울 것인디 따라 갈끄라우?”
“아녀, 아들은 아부지 약주나 한 되 받아다 놓아라. 풋나무 해오시면 출출할 것잉께.”
“알았어라우~”

덤으로 익모초를 구하지 못했을 때는 쑥 서너 줌 따 말려서 머리에 이고 방앗간으로 가신다. 여름철 가족들의 입맛과 영양을 생각하여 방앗간에 다녀오시는 것이다. 그 무렵엔 설과 추석 대목, 정월 대보름 다음으로 방앗간이 바쁘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거의 때를 같이 하여 *‘미싯가루’(미숫가루의 사투리) 만들러 가시기 때문이다.

뛰듯 부산히(바삐 서둘러) 집을 나서 학교 마을 새터로 차를 타러 가시는 뒷모습을 동구 밖까지 나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버스 올 때를 맞춰 신작로로 혹여 어머니가 오실까 나와본 것이 서너 차례다.

어머니를 기다린 지 꽤 오래다. 지친 나머지 감나무에 붙은 매미소리를 들으며 *말래(마루)에 누워 부채질을 하며 낮잠 한숨 자니 파리 떼가 성가시게 한다. 흥건해지도록 땀을 흘리며 잔 통에 냉수 한 그릇으로 잠을 깬다.


어머니는 보리쌀이 아닌 콩보리를 볶았습니다. 색깔은 다소 거무스름하고 거칠지만 이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보리쌀이 아닌 콩보리를 볶았습니다. 색깔은 다소 거무스름하고 거칠지만 이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김규환
이윽고 아버지께서는 지게에 가득 여린 풋나무를 베어 퇴비자리에 *‘부리신다’(실려 있는 짐을 내려놓다).

“아부지, 약주 받아놨어라우~”
“그려! 정제 가서 풋꼬추 세 개하고 된장 각과라~”
“예.”


마루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콸, 콸, 콸~” 부드러운 소리가 나게 큰 대접에 가득 따라 “크억~” 하시며 한 모금에 비우신다.

“어~ 시원~허다.”

막걸리 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무던히도 맵던 재래종 고추 한 개를 된장 푹 찍어 “사각” “쓱-” 베어 드시고 팔뚝으로 입가에 흐른 막걸리를 쓱 닦는다. 당신께서는 미숫가루보다 막걸리를 즐겨 드셨다.

검은콩 껍질을  벗기면 속이 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푸르스름합니다.
검은콩 껍질을 벗기면 속이 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푸르스름합니다.김규환
미숫가루 만들러 가셨던 어머니께서 해지기 전에 돌아 오셨다. 그 날은 어머니가 반가운 건지 미숫가루가 반가웠던지 모른다. 다리께 까지 마중을 나가 어머니 짐을 받아 들춰 메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루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들어갔다. 대접과 숟가락 설탕을 들고 나온다.

아직 뜨끈뜨끈 한 기운이 남아 있다. 색깔은 통보리를 그대로 볶아 거뭇거뭇 하고 푸르스름하다. 얼마나 맛있게 만들어졌는가 확인하기 위한 시식 시간이다. 꽉 처맨 보자기가 밉기까지 하다. 요리조리 젓가락까지 넣어가며 풀고 비닐 봉지를 열어 한 숟갈 가득 떠서 고소한 향을 맡으며 입에 털어 넣는다.

“헉!”

목구멍이 콱 막힐 듯 헛기침 마저 불러일으킨다. 숨을 고르고 침을 섞어가며 입맛을 연신 다신다. 가루가 적당히 씹히는 맛도 있다. 곁들여 설탕을 반 숟가락 먹으니 행복도 씹혔다.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 어머니와 6남매 형제자매들은 여름에는 감자 쪄 먹고 강냉이 삶아 허기를 채우던 것 빼고는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다. 매번 꽁보리밥에 된장국, 간혹 오이지국(오이냉국)에 먹으니 물리기 쉬워 입맛을 앗아간다.

땀 뻘뻘 흘리며 김매고 꼴 베다보면 애 어른 가리지 않고 체력이 뚝 떨어진다. 가족 누구나 잘 먹던 미숫가루. 여름 내내 두고두고 먹을 간식거리로 미숫가루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더위를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매번 이열치열을 경험하기도 정도가 있었다.

형수가 만들어 보내 준 미숫가루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예전 맛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여전히 맛있어요. 잘 먹고 있습니다.
형수가 만들어 보내 준 미숫가루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예전 맛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여전히 맛있어요. 잘 먹고 있습니다.김규환
미숫가루는 타 먹기도 편했다. 널찍한 그릇에 시원한 찬 물 한 모금 붓고 미숫가루 네댓 숟갈 넣고 흰 설탕 듬뿍 집어넣어 뒤섞는다. 작은 가루 입자들이 기포를 일으키며 숟가락에 착 달라붙기 쉽상인데 여유를 갖고 흘리지 않게 저어줘야 한다.

수회를 반복하며 된 죽처럼 걸쭉하게 짓이겨지면 물을 더 부어 묽게 만든다. 몇 개는 아직 덩어리가 져 있다. 마저 숟가락 뒤쪽을 그릇 옆부분을 활용하여 다 으깬 다음 한 모금 마셔보는 그 맛!

달짝지근하고 *‘꼬습고’(‘고소하다’ 보다 센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말 ‘꼬시다’에 해당하는 말) 감칠맛 나고, 혀를 간질이듯 작은 알갱이가 미각을 자극해 어쩔 줄 모르게 한다. 이뿐인가. 쑥과 비슷한 익모초를 넣어서 인지 쌉싸래하지만 이내 향긋해져서 갈증마저 싹 가시게 한다.

누가 있든 없든 “햐~ 참말로 꼬습구만~” 독백이나 방백을 하고 한 손엔 숟가락을 들고 덩어리 진 것을 깨 녹여가며 한 그릇을 비우면 밥 한 그릇 먹은 거나 진배없다.

어른들 막걸리 드시고 트림을 하듯 몸 속에 있던 공기를 빼내면 부러울 게 없었다. 이런 맛난 걸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빠지지 않고 먹었다. 한 말 가량을 몽글게 빻아오면 깔 베러 갈 때 한 그릇 꼭 챙겨 먹고 갔다. 든든하여 힘이 절로 났다.

한 숟갈 입에 털어 넣는 맛도 좋지요. 고루 섞어 설탕 듬뿍 넣고 한 그릇 쭈욱 비워보세요. 든든합니다. 시원한 물에 얼음까지 타면 그게 빙수인가요?
한 숟갈 입에 털어 넣는 맛도 좋지요. 고루 섞어 설탕 듬뿍 넣고 한 그릇 쭈욱 비워보세요. 든든합니다. 시원한 물에 얼음까지 타면 그게 빙수인가요?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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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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