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공 이면우 시인안병기
<저 석양> <그 저녁은 오지 않는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등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한 이면우 시인의 직업은 보일러공이다.
처음 이면우 시인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글을 쓰고 있던 <장작불의 불땀처럼>에서였다. 시인은 가끔 그 사이트에 있는 시 쓰기의 옛 도반을 찾아오곤 했다. 그의 필명은 어린 시절 별명을 딴 '돌부처'였다.
지난 주 금요일 나는 그가 근무하고 있는 대전 정부 3청사 근처에 있는 신용보증기금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시인은 내 아이디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내 뜻밖의 전화에 매우 반가워했다. 시인과 나는 그가 근무하는 기술신용기금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화요일 11시경에 만나기로 했다.
화요일 오전 11시 이면우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방문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시인은 "왜 빨리 안 오느냐"고 답했다. 난 택시를 잡아타고 그의 근무처인 기술신용기금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보일러실은 지하 주차장과 함께 있었다. 키가 땅딸막한 시인과 시인 보다 5cm쯤 하늘에 가까운 나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장작불의 불땀처럼> 사이트에서 짤막한 댓글을 나누기 시작한 지 1년 반만의 만남이었다. 먼저 그를 보일러실 중앙에 세워놓고 셔터를 눌렀다.
그의 최종 학력인 중학교 생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일장 대회에 나가서 상 타던 이야기, 그리고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를 왜 포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이어졌다.
이문재 시인이 <문학동네>라는 문에지에 쓴 <내핍의 시학, 그 따뜻하고 서늘한>이란 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저녁상을 치우고 나자, 시인 이면우씨는 대뜸 새 칫솔을 꺼내주며 양치질을 하라고 했다. 이씨는 외출을 할 때도 반드시 칫솔을 챙겨,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무언가 먹고 나면 기어코 이를 닦아야 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지만 자기집 손님에게까지 이를 닦으라고 할 줄은 몰랐다. 나는 오래 된 주공 아파트 욕실에서 푸카푸카 양치를 한 다음 자리를 올겼다."
내가 그 얘기를 꺼냈더니 시인은 "내가 그 건 너무 했지요?"라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뭘요? 좋은 습관인데요"라고 나는 그를 안돈시켰다.
이윽고 점심 시간이 됐다.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 곳은 근무처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중국집이었다. 그는 잡채밥을 시키며 "밥이 맛 있어요"라고 밥 예찬을 시작했다.
"얼마나 드시는데요?"
"냉면 같은 경우는 두 그릇 먹어요."
점심을 끝내고 그의 일터로 되돌아가는 길에 그는 중학생인 아들을 위해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신발 한 켤레를 샀다.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한단다. 공부하면 경쟁해야 하고 그러면 삶이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그 대신 몸의 감각을 이용해 노동을 하면 생이 행복할 수 있다고 얘기한단다.
그의 부인은 두어달 전부터 간병인 일을 하고 있는데 24시간 근무하고 하루 쉬고 또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고된 일이다. 보수래야 이것 저것 제하고 나면 80∼90만원에 지나지 않지만 호스피스 일을 하고 싶어하는 그의 아내에겐 돈보다 더 큰 기쁨과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했다. 딱 1년만 간병인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단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녁밥을 짓는 일이라든가 가사일은 자연스레 그의 차지가 돼버렸다.
다시 그의 일터에 도착했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그는 내게 칫솔을 주며 양치질을 권했다. 보일러실 한 켠에 있는 세면장에서 양치질을 하고 나서 5층에 있는 체력단련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계속했다. 삶에 대한 성실성,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 결코 자기 분수를 벗어나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므로써 안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그가 가진 삶에 대한 치밀한 전략적 사고였다.
중학교 때 백일장 대회를 휩쓸던 그는 시가 가진 관념이 싫었다. 구체적인 것, 생계에 보탬이 되는 것만이 의미 있는 거라고 믿었던 그는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詩)를 버렸다. 그렇게 시를 버린 그가 이름을 밝히길 꺼려하는 어느 소설가로 부터 부추김을 받은 끝에 나이 40세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 3편을 쓰게 됐다.
편당 4만원씩 모두 12만원의 원고료가 생겼다. 그 당시 그 돈은 쌀 한 가마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의 어릴 적 조상들이 살아 있다면 "야, 면우야. 어떻게 그런 걸 써주고 쌀 한 가마니를 얻을 수 있냐?"라고 놀랄 정도로 큰 돈이었다. 아무튼 그는 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는 내내 삶에 대한 구체성과 자기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의 시는 도처에 삶에 대한 긍정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그에게 그의 시의 단점에 대해 얘기헀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슬픔이 없다는 게 그의 시의 단점이라고 말해주었다. 삶에 대한 지나친 긍정은 그의 시에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슬픔을 제거해버린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