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껴봐요

독서이야기9 <서울의 고궁 산책>

등록 2003.08.15 23:34수정 2003.08.1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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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고궁 산책>의 표지
<서울의 고궁 산책>의 표지효림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은 그저 지하철 노선표의 수 많은 역명 중 하나이지요. 그러고 보니 경복궁 하면 떠오르는 게 사생대회 정도입니다. 그림 그리기가 싫어 아이들과 떠들고 놀았던 장소로 말입니다.

마침 종로에 살고 있기 때문인지 경복궁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여서 그곳을 지나갈 때가 많았죠. 하지만 늘 등잔 밑은 어두운 법. 건너편 길가에 즐비한 모던한 화랑의 건축물에 시선을 빼앗겨도 익숙한 경복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경복궁일 뿐이었습니다.

별 달리 새로울 게 없겠다 싶은 이 책을 그래도 읽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아들녀석과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주변의 고궁을 좀 알고 즐기자는 기분으로 손에 쥔 것이지요. 제목 또한 '서울의 고궁 산책' 이잖아요. 산책이니 그저 눈이 돌아가는 데로 따라가 주면 될 것이기에.


그러나, 저는 알게 됐습니다. 심드렁한 눈길은 궁궐의 개괄적인 역사를 넘기는 네 부분(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의 페이지에서부터 비로소 확인됩니다. 제 무지를, 그리고 그 무지를 얼마나 부끄러워 해야하는지를,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자신이 살아온 자리에 대한 무심함이 이토록 깊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일제 점령기에 있었던 엄청난 훼손과 소실은 가장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궁의 현재 모습에 대한 작가의 불만 섞인 토로는 제 마음에 바로바로 와 닿습니다. 일제를 향해 화를 내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분노 이전에 제 무심함을 먼저 반성해야 했습니다.

경복궁에 가도 정문이 어디인지 의심해 본 적이 없고, 텔레비전에서 수없이 재현된 명성황후의 시해 장소가 어디인지 궁금해 해본 적도 없습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비극도, 사도 세자의 죽음도 동행인들과의 수다에 묻혀 버렸지요.

저자는 잊혀져 가는 경복궁의 신세를 안타깝게 그리고 있습니다. 광화문의 해치(해태)상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궁을 지키는 정의의 사자' 정도이지요. 하지만 이 해치상의 깊은 뜻과 그동안의 불행한 변화에 관심을 가져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요. 해치상의 그 당당함을 잃어버린 과정은 일제에 의한 만행에서부터입니다.

궁궐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졌던 해치의 누추함은 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처입니다. 대한문 앞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려 있는 두 마리의 서수도 마찬가지 신세지요. 반은 땅에 묻힌 채 뭇 사람들의 엉덩이 아래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덕수궁이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짓밟히지 않았다면 아직도 대한문을 오르는 아름다운 돌계단 좌우에 위엄 있게 버티고 앉아 있을 텐데, 얼마나 엉덩이로 비벼댔는지 서수의 얼굴과 등덜미는 닳고닳아 반질반질 윤이 납니다. 비록 반쯤 땅에 묻혀 있지만 조선시대 서수 중에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어디 서수뿐이겠습니까. 일본인의 손에 해체된 우리들 궁궐의 예는 수도 없지요. 일제 만행이, 실감나지 않았던 '침략'이 이렇게 실재할 줄, 직접 느껴질 줄, 바로 내 눈앞에 벌어진 재앙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덕수궁은 본래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큰, 지금의 법원에서 경향신문사로 통하는 도로 북쪽 일대까지의 범위였답니다. 하지만 일제가 궁 안에 도로를 만들어 허리를 잘라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렸고 1960년대에는 우리의 잘못으로 또다시 수난을 겪었지요.


'당시 서울시는 덕수궁을 도시민의 공원으로 ,놀이터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궁내에 스케이트장을 만들고, 벤치를 놓는가 하면 상점과 음식점을 지었다. 담장을 철책으로 만든 것도 길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야말로 일제에 뺨치는 궁궐의 공원화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디 덕수궁뿐이겠는가. 창경궁의 드넓은 잔디밭엔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일제는 흔적도 없이 불태우고 순종으로 하여금 무료한 시간을 메우게 하느라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웠답니다. '신기한 물건에 정신을 팔게 하여 국가와 민족에 대한 생각을 잊게 하고 저들에 대한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책략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이마에 땀방울을 매달고 서울의 고궁으로 산책(?)을 떠나보면 어떨까요?

서울의 고궁 산책 -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종묘

허균 지음,
새벽숲,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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