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파리가 무성하면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

[시 더듬더듬 읽기 ⑧] 김지하 詩 <무화과>

등록 2003.08.16 05:00수정 2003.09.0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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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겐 꽃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바로 열매맺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친구는 손 뽑아 등 다스려주며
이것 봐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 게
그게 무화과 아닌가
어떤가


일어나 둘이서 검은 개굴창가 따라
비틀거리며 걷는다
검은 도둑괭이 하나가 날쌔게
개굴창을 가로지른다

김지하 詩 <무화과> 全文


계절이 어느 새 가을로 들어섰다. 열심히 일한 꽃도 어영부영 일한 꽃도 익어가서 제가끔 꽃씨를 품었다. 나는 꽃들이 보여주는 이런 노동의 등가성(等價性)이 보기 좋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도 이 노동의 등가성 혹은 존재의 등가성이 제대로 지켜지는 때가 올 수 있을까.

그런데 세상에는 꽃 없이 열매 맺는 식물도 있다. 바로 무화과라는 나무다. 아니다,그 말은 틀렸다. 隱花果(은화과)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무화과는 꽃을 감추고 있는 나무다.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식물의 줄기에 잎이 부착되어 있는 부분의 위쪽인 잎겨드랑이라 부르는 지점에 꽃이삭이 달리고 그 안에 작은 꽃들이 많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무화과 나무
무화과 나무안병기
김지하의 시 <무화과>는 이 무화과라는 식물의 속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詩는 잿빛 하늘과 그 하늘마져 무화과 한 그루가 가리고 서 있는 우중충한 풍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추측컨대 두 사람은 어디선가 술을 마신 모양이다. 그리고 넘쳐오르는 취기를 견디지 못한 한 친구가 담 아래다 토하기 시작한다. 다 토하고난 친구는 회한에 잠겨서 푸념을 한다.


"이봐,내겐 꽃시절이 없었어"라고. 그러자 다른 친구는 "꽃 없이 바로 열매맺는 게 무화과 아닌가"라면서 그 친구를 위로하는 것이다.
"네가 바로 그 무화과 같은 놈이야"라고. 그러나 자신의 위로가 친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취한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며 다시 한번 위로의 말을 건넨다. "열매 속에서 속꽃 피는게 무화가 아닌가(자넨 바로 그런 사람이야)."

이 시(詩)를 관통하는 것은 꽃 피지 못하고 그냥 흘러보낸 젊은 날에 대한 허망함과 자기 연민의 감정이다. 젊은 날 시대의 첨단에 서서 하나의 깃발로 나부껴야 했던 시인은 아마도 못 다 불사른 자신의 젊은 날에 대한 '씻김굿"으로서 이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김지하의 수 많은 시편들을 놔두고 이 <무화과>라는 시를 애송(愛誦)하는 데는 나름 대로의 까닭이 있다. 고백하자면 나의 젊은 날도 이 시(詩) 속의 화자(話者)처럼 너무도 조용했다. 조용한 나머지 청춘이면 누구나 한번 쯤 겪어야할 가슴 뛰는 그리움도 몸 뒤척이는 불면 따위를 수반한 연애 따위의 사건도 없이 흘러 보낸 것이다.

사람이 본디 생기다만 오이 형국으로 쭈글쭈글한 탓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허무주의의 제자였으며 금욕으로 대표되는 스토아학파의 신도였다는데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그때 난 해 아래에서 불변(不變)하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고 따라서 변화무쌍한 물질인 "여자'에 매달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가치한 일인가를 곱씹곤 했다.

결국 무미건조한 청춘을 보낸 나는 이제 뇌리에 각인된 청춘의 추억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쓸쓸한 중년이 되어 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라는 속담이 있다. 말하자면 내게 있어 김지하의 이 <무화과>라는 시(詩)는 그런 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난 때때로 "동병상련"이라는 지극히 초보적인 연대의 감정으로 이 시를 읽곤 했다.

'그래, 내게도 저 이처럼 꽃시절이 없었지'라고 중얼거리면서. 콩 같은 식물이 그렇듯이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열매가 드물다. '이파리가 무성하면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릇 생명가진 모든 것에 예외없이 적용되는 철칙이다. 잡념이 무성하면 사물의 명징한 의미를 붙들 수 없다는 걸 생각한다.

어제 길을 걷다보니 남의 집 담벼락 위로 연록색 열매를 단 무화과 나무가 보였다. 저 무화과 나무도 꽃 없이 보낸 여름날을 후회하고 있을까. 하느님,나도 제발 겉꽃 핀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세요. 무화과 나무가 버티고 있는 모양이 마치 연좌농성을 벌이는 사람 마냥 몹시 심술궂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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