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체 게바라 평전> 이 시대의 '게릴라'들을 위한 잠언

등록 2003.08.16 15:09수정 2003.08.1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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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사

1968년 5월,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학생혁명’의 깃발은 라틴아메리카가 낳은 한 게릴라 지도자의 초상과 함께 온 거리마다 물결을 이뤘다. ‘사랑 없이는 혁명도 없다’던 30여년 전의 외침은 이제 젊은 세대를 겨냥한 광고문구 정도로 무장해제 되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의와 인간애 같은 것이 삶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박제되지 않는 ‘잠언’과도 같다.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세르나. 아르헨티나의 촉망받는 의사 출신으로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독재에 대항하기 위해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던 19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 체 게바라.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칭송했던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다룬 <체 게바라 평전>은 15년간 체 게바라 가족과 동료들의 증언들, 그의 일기와 메모 등을 토대로 저술함으로서 그의 생애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왜 다시 체 게바라일까. 체 게바라는 진보의 열망을 품었던 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각인되어있는 하나의 ‘아이콘’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뒷골목 풍물시장에 가면 체 게바라 티셔츠를 팔 정도다. 즉, 체 게바라는 혁명가이기 이전에 20세기를 대표하는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별을 단 베레모와 덥수룩하게 기른 구레나룻, 그리고 유형화되지 않은 강렬하면서 매혹적인 눈빛을 지닌 이 혁명가는 67년, 39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인간에 대한 불가사의한 애정을 가진 진정한 ‘게릴라’였다. 비록 수탈과 압제, 제국주의 맞선 그의 게릴라 투쟁은 실패와 죽음으로 방점을 찍고 말았지만, 그가 남미의 제 3세계 국가에 전파하려 했던 혁명의 이념은 이제 하나의 ‘전설’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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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사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엘리트였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목격한 그는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혁명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되었고,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이 시대의 모순이 바로 ‘질병’이며 우선적으로 치료해야 할 본질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그는 고독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을 향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55년 7월,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운명적으로 피델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 ‘양키’라는 적에게 착취당하는 남아메리카 대륙을 구해낼 방안을 놓고 밤새 토론을 벌인다. 여명이 밝았을 때 카스트로는 게바라에게 제안한다. “압제자 바티스타로부터 쿠바를 해방시킬 대장정에 동참하자”고.

혁명동지들로부터 ‘체’(기쁨 슬픔 놀람 등을 나타내는 감탄사로 ‘나의’라는 뜻을 지닌 인디언 토속어)로 불린 체 게바라는 58년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59년 1월 마침내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 뒤 쿠바 혁명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한 그는 검은 베레모와 낡은 군복 차림으로 남미 각국을 돌며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혁명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정부의 요직을 버리고 새로운 혁명을 위해 자신을 또 다른 사지를 향해 스스로 몰아갔다. 65년 그는 결국 내전 중이던 콩고로 날아갔고 이듬해엔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혁명을 위한 게릴라전을 감행한다. 그러나 대오를 이탈한 부하의 배신으로 그는 최후의 결전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유언은 짤막했다. “카스트로에게 전해주오. 이 실패가 혁명의 종말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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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문학사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인 장 폴 코르미에가 95년 탈고한 이 책은 체 게바라의 삶을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의 출생부터 55년 운명적으로 만난 카스트로와의 조우가 그 첫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카스트로의 오른팔로서 쿠바 혁명을 이루어낸 59년 1월까지, 정치가 겸 행정가로 국가 요직을 맡고 있었던 65년까지를 세 번째 시기라고 한다면, 볼리비아로 건너가 삶을 마친 67년이 마지막 시기다.

이 네 시기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지은이가 거듭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체의 인간적인 면모다. 개방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그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적인 견해를 보인다. 스페인에서 프랑코 장군이 내전을 일으켰을 때, 여덟 살의 게바라는 “다른 아이들이 경찰과 도둑으로 편을 갈라 놀 때 공화파와 프랑코파로 갈라 전쟁놀이를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칠 줄 몰랐던 활동성은 그의 또 다른 특징이다. 두 살 때부터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녔던 천식의 발작이 엄습해 올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보았기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두 배, 세 배로 농축”해 살았다.

이런 활동성은 육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를 알레르기 전문의이자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의 전장에서 게릴라들을 이끄는 지도자로, 민중들에게 혁명정신을 일깨우는 교사로 남게 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작가가 그의 인간됨 가운데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 그의 정직성에 있다. 그는 대사로서 외국을 순방하면서 미국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소련의 패권주의도 가차없이 비판했다. 그런 이유로, 소련에 의지하고 있던 카스트로와 소련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에게 마르크시즘이란 순수함 자체였다고 해석한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외쳤던 이 혁명가에게 내리는 수많은 추모 행렬은 아마도 그의 삶의 저변에 깔린 민중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남았기 때문이 아닐까.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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