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인간이 느끼는 자아정체성의 혼란

샤를로테 케르너의 <블루 프린트(Blue Print)>

등록 2003.08.19 10:29수정 2003.08.1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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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블루 프린트>
책 <블루 프린트>다른우리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에 의하면, 복제는 분명 유전학적 원형과 복제품 사이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전혀 새로운 종류의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확립하게 할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인간 복제는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균형잡힌 조건들을 해치게 될 것이다."

이 책 <블루 프린트>는 복제를 통해 태어난 한 인간이 어머니이자 쌍둥이 자매와의 갈등을 통해 느끼는 자아 정체성의 혼란을 그려내고 있는 가상 소설이다. 현재 인간의 유전자 복제는 금지되어 있는 상태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 복제는 새로운 인간 유형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오랜 기간 심사숙고가 필요한 윤리 도덕적 문제를 포함한다. 언뜻 보면 간단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생화학적 문제들이 사실은 인간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 문제를 뒤흔들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측면에서 복제로 태어나게 된 첫 인간상을 그려내고 그 인간이 어떤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것인지에 대해 상상하여 쓴글이다. 유명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이자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독신 여성인 이리스는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과 같은 인간을 하나 복제하여 만들고 싶어한다.

그녀는 유전자 복제를 연구하고 있던 피터 박사를 찾아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결국 자신의 체세포를 통해 유전자 복제를 감행하여 자기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낳는다. 이 아이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 이리스(Iris)를 거꾸로 한 시리(Siri)다.

시리는 유전자와 유전자의 조합을 통해 태어나지 않고, 단일 체세포의 유전자를 그대로 복제하여 만든 최초의 아이다. 그녀는 쌍둥이 자매이자 자신의 엄마인 이리스에 대하여 애증(愛憎)을 동시에 가진다. 그것은 원하지도 않게 엄마와 동일한 모습을 가지게 된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그런 자신을 만들어낸 엄마에 대한 분노다.

세상 사람들도 이 복제 인간을 그저 이리스의 분신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가 이리스보다 더 나은 연주 실력을 가질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궁금해할 뿐이며, 한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시리는 어디에도 없다.


이러한 사회의 시각에 염증을 느낀 시리는 청소년기가 되자 병들어 죽어 가는 엄마에게 대항한다. 엄마가 원하는 모습에서 탈피하기 위해 바둥거리지만 결국 그녀는 이리스가 가진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그녀의 외모를 그대로 닮았을 뿐이다.

시리는 자신의 성장 과정에서 엄마에게서 최대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를 따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괴로워한다. 자신은 어떠한 독립된 인격체도 아닌 이리스에게 소속된 쌍둥이 동생이자 자식일 뿐이라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더 큰 청소년기의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시리의 이와 같은 자아 정체성의 혼란은 결국 어머니인 이리스가 죽고 나서야 안정을 찾는다. 사랑과 미움을 함께 느끼게 했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동안 정신적 방황을 겪던 시리는 몇 년이 지난 후 화가로서 데뷔전을 연다.

어머니에게서 완전히 독립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녀가 자란 지 한참 뒤의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길을 발견하고 이리스의 종속물로서의 위치를 탈피한다.

이 책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한 사실들에 대한 상상이다. 복제 인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요즈음 과연 그러한 일들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과 파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진중한 논의가 필요하다.

새로 태어날 수도 있는 인간상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어떠한 변화를 겪을 것이며, 그리고 그 인간들은 어떠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것인지에 대한 예측과 대비없이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인간 복제가 아닐까 싶다. 과학자들의 윤리적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기에 그들의 어깨가 더 무거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블루프린트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수영 옮김,
다른우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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