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옥은 바닥에 엎어진 채 자신의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있는 배루난을 거칠게 밀쳐내며 싸늘한 음성을 토했다.
"흥! 무림지옥갱을 먼저 다녀온 선배로서 한 마디 충고한다면 거기서 탈출할 생각은 아예 품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피거형이라고 들어 보았느냐?"
"피, 피거형이라니요? 피거형이라면 가죽으로 만든 부대 속에 집어넣고 실컷 먹인 다음 제가 싼 인분 속에 빠져 죽는…"
"호오! 잘 알고 있군. 그래 탈출하다 발각되면 피거형에 처해지니 탈출은 아예 꿈도 꾸지 마라."
"허억! 서, 설마 소문이, 소문이 진짜란 말씀이십니까? 진짜 피거형에 처합니까? 허억! 그러고 보니…"
배루난은 무림지옥갱에서 피거형이라는 전대미문의 형벌로서 탈주자들을 다스린다는 소문을 들은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겁주기 위한 것 일 뿐 실제로는 그런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탈출하다 잡히면 그냥 죽이면 되지 굳이 먹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가 생각해냈는지 정말 기상천외할 뿐만 아니라 겁주는데는 딱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피거형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중 떠오르는 생각에 그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하옥되었던 이회옥이 연쇄살인범인 냉혈살마 안선중과 희대의 색마인 비접나한 손해구와 더불어 무림지옥갱을 탈출하다 발각되는 바람에 피거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결국 냉혈살마와 비접나한은 자신이 배설한 배설물 속에 빠져 죽었지만 철마당 부당주가 된 이회옥만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실제로 피거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잔뜩 겁을 집어먹으며 헛바람을 들이킨 것이다.
이 순간 이회옥의 머리 속을 스치는 상념이 있었다. 배루난과 선무분타에 같이 근무했던 마구위를 찾아내 그 역시 팔열지옥갱에 보내버릴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면 둘은 지긋지긋한 작업을 견디다 못해 탈출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발각되게 된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무림지옥갱을 벗어나는 방법은 늘 감시의 눈초리가 번뜩이는 출입구 이외에는 없다.
따라서 산중에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절해고도에 위치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아무튼 탈출을 도모하지 않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중노동에 시달리는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고, 탈출하다 발각되면 피거형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이것이 아무 죄도 없는 어린 소녀들을 학살한 죄에 대한 댓가로 더 적합하다 생각한 것이다.
"당장 이놈의 아혈과 마혈을 제압한 후 총단으로 압송하라."
"존명!"
"아이고, 부당주님 속하가… 으윽!"
이회옥이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애걸하던 배루난은 갈참이 날린 지풍에 격중되는 순간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그의 눈에서는 그야말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복무기간이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는데 졸지에 죄수가 되어 압송되니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모양이었다.
한편 갈참은 근무시간에 계집과 운우지락을 나누던 죄가 있기에 얼른 이회옥의 명을 쫓아 마혈과 아혈을 제압한 후 배루난을 어깨에 걸머졌다. 그리고는 쏜살처럼 총단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본좌가 형당에 당도하지 전에 모든 수속을 마쳐 놓도록!"
"존명!"
배루난을 걸머진 갈참이 사라지자 이회옥은 허공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후후! 그곳이 어떤 곳인지는 안 겪어 본 놈은 모르지. 놈, 지옥이 어떤 곳인지 철저히 맛보겠군! 후후후!"
이회옥은 자신이 겪었던 무림지옥갱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 * *
"정말, 꼭 가야 해요?"
장일정은 촉촉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는 호옥접의 시선을 마주볼 수 없었다.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호옥접은 사부인 동해무치(東海武癡)가 갑자기 세상을 등지자 반광노조 형운악과 더불어 신선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세수 일백이 훨씬 넘었으니 그만하면 천수를 누린 셈이고 갈 때도 되었다. 아무튼 졸지에 사부를 잃은 호옥접은 할 수 없이 강호로 돌아왔다.
그녀는 뭍에 상륙하자마자 된 소화타 장일정에 대한 소문을 귀가 따갑게 들을 수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의원들의 집합체인 무천의방의 부방주가 되었다는 소문은 그녀로 하여금 흐뭇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소문이었다.
그를 만나겠다는 일념에 부지런히 이동한 결과 한 달쯤 전에 무한에 당도하였으나 성내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장일정과 친 혈육지간도 아닐 뿐만 아니라 부부지간도 아니기에 출입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하여 간신히 전갈을 넣자 장일정은 그야말로 날 듯이 뛰어나왔다.
오랜만에 만나기에 그동안 어떻게 지냈으며, 얼마나 변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던 그녀는 장일정의 태도에 내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나기만 하면 덥석 끌어안을 줄 알았다. 그러면 못이기는 척 그의 품에 안기면서 그동안 몹시 그리웠다고 말하려 하였다.
그런데 장일정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말 없이 바라만 볼뿐이었다. 너무 오랜 동안 떨어져 있어 순간적으로 어색함을 느낀 결과이다.
하긴 헤어질 때만해도 아직 소년이었고, 소녀였다. 그런데 어엿한 청년과 처녀가 되어 만나게 되자 왠지 예전처럼 굴 수 없었으며 서먹함이 감돌았던 것이다.
이런 침묵을 깬 것은 반광노조의 헛기침이었다.
"허허허! 오랜만이구나. 그래, 그동안 잘 있었느냐?"
자애로운 조부같은 반광노조를 본 장일정은 갖출 수 있는 최대의 정중한 대례로서 그를 맞이하였다. 생명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의조부이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무한의 작은 장원 하나는 주인이 바뀌었다.
새로 장원에 주인이 된 사람은 무천의방의 부방주인 소화타 장일정이었지만 그곳에 기거하는 사람은 한 손이 뭉그러진 노인과 꽃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들 둘은 각기 소화타의 조부와 정혼녀로 소문났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장일정은 아흐레에 한번씩 장원을 찾았다. 무천의방의 의원들은 아흐레에 하루씩 쉬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이면 장원의 정문 앞에는 장사진이 쳐져있기 마련이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신의인 화타와 버금간다는 그에게 진료라도 한번 받아보기 위하여 환자들이 밤새 기다린 것이다.
장일정은 자신이 돌볼 수 있는 한 성심껏 환자들을 돌보아주었다. 덕분에 그의 장원은 의성장(醫聖莊)이라 불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호옥접의 조부인 남의 호문경의 장원 이름과 같은 명칭이었기에 내심 흐뭇해하고 있었다.
오늘 호옥접은 장일정을 기다리며 머리를 매만졌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향기로운 술도 준비하였고, 기름진 안주도 준비하였다. 드디어 단 둘이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엔 반광노조가 늘 함께 하였기에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했는데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반광노조가 배를 처분하고 오겠다면서 낙향하였기에 이런 기회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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