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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일생을 칠십으로 본다면 37년간의 세월이란 엄청나게 오랜 기간이다. 그 지긋지긋한 일제 36년보다 1년이나 더 긴 세월이 아닌가?
나는 지난 37년 동안 니코틴의 마굴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 있었다. 몇 번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번번히 나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1965년 3월 2일. 그 때 나는 밤송이 머리에 대학 교복을 입은 신입생으로 입학식에 가는 길에 열 개피짜리 '희망'이란 담배 한 갑을 샀다. 솔직히 그 전에도 담배에 관한 한 매우 인심이 좋은 친구들이 권해서 한두 번 태워본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태우기 시작한 날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입학식이 끝난 후 쉬는 시간에 같은 학과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서로 담배를 권했다. 비로소 어른이 된 기분으로 으쓱했다. 아직 몸에 담배 연기가 익지 않아서 콜록거리며 아주 힘들게 배웠다. 마치 담배를 태우지 않으면 아직 미성자의 티를 벗어나지 못한 양.
그 때는 오늘날처럼 사회적으로 요란스러운 금연 열풍이 없었다. 어른이 되면 으레 담배를 태우는 것으로 여겼고, 남자 손님이 오면 먼저 담배와 재떨이를 내놓았다.
나는 흡연하기 시작한 시점은 다른 친구보다 다소 늦었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샌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참으로 억세게 열심히 태웠다. 나는 학생군사훈련단(학훈단) 출신으로 대학 3, 4 학년 여름방학 때는 4주간 병영훈련을 받았다.
그 때는 현역 훈련병의 수준으로 보급품을 지급받았는데, 그 무렵에는 일률적으로 1인당 하루에 담배 반 갑씩 배급되었다. 필터도 없는 화랑 담배였지만 야외 교장에서 ‘10분간 휴식’ 시간에 교관이 “담배 일발 장진”하면 피교육자들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점화”하면 라이터나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졸업 후 전방 소대장으로 있을 때 소대원들이 휴가 다녀오면 귀대 인사로 전령을 통해 소대장에게 담배 한 갑 상납하는 게 관례였다. 2년여 소대장 노릇하면서 소대원으로부터 숱하게 담배 상납을 받았던 뇌물 수수 전과자였다.
제대 후 몇몇 학교를 전전하다, 1976년 기독교 계열의 현 재직 학교에 부임하면서 나를 소개했던 분에게 첫 질문이 ‘담배 태워도 괜찮으냐?’였다. 만일 그때 흡연자는 안 된다고 했다면 부임을 포기했을 것이다. 정말 억세게 담배를 태웠다.
잘 쓰지 못한 글을 쓴다고 제일 먼저 준비하는 게 원고지와 담배 한 포였다. 밤을 새며 원고를 쓰면 재떨이가 수북이 쌓였다. 글이 술술 쓰여 지지 않으면 니코틴 부족 탓으로 돌려 줄 담배로 빈 머리를 괴롭혔다.
누군가 내 건강을 위해 금연이나 절연을 권하면 "공초 오상순 시인을 여러 차례 뵈었는데, 그분은 하루 100 개비 이상을 태우고도 일흔도 더 사셨다"고 공초 선생을 팔면서 일언지하 충고를 잘라 버렸다.
아내와 혼담이 오갈 때 만일 결혼 조건으로 금연을 내걸었다면 나는 결혼도 못했을 것이다. 아내는 결혼 후에도 내 흡연에 대해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첫 딸을 낳은 후부터는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갓난 아기 코에다 독한 연기를 넣을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아이가 있는 방에서는 담배를 태울 수 없었다. 그 때의 담배 이야기가 동아일보에 <구차한 골초>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했다.
둘째 아이도 태어나고 아이들이 담배 연기에 표정을 찡그리자 아내는 마침내 집안 내 금연을 선언했다. 이제는 1: 1이 아니라 1: 3이라 할수없이 바깥에서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고를 쓸 때만은 내 방 문을 꼭 닫은 채 창문을 열어 놓고 열심히 태웠다. 하지만 그 냄새가 집안으로 들어와서 아내와 오랜 갈등을 빚었다. 마침내 아내는 동침을 거부하고 방을 따로 쓰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나는 담배를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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