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표 부담없는 DJ, 대미 악역 자임하다

우리도 이제 공익 봉사형 전직 대통령을 갖게 되었다

등록 2003.08.21 19:20수정 2003.08.2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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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대통령이 21일 하바드 국제학생회의 연설을 통해 대통령이 아닌 신분으로 입을 열었다. 대통령직에 있을 때에는 사실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는 법이다. 현역 정치인 시절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김 전 대통령은 정치 입문 후 50여년만에 처음으로 득표를 감안하지 않고 입을 뗀 셈이다.

이번 연설은 역시 김대중다웠다. 그의 연설은 잘 설계돼 있고 핵심 부분은 최대한 건조한 게 특징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짤막한 구어체 문장을 통해 핵심을 제시하는 데 반해 김전대통령은 신중하면서도 건조한 화법이 특징이다. 김전 대통령은 이런 화법이 메시지 전달에 더 강력하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결론적으로 김 전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미국 우파의 강경론을 공식 경고했다. 한국 정부에는 대미 자주적인 자세를 강조했다. 다음 선거에서 표를 달라고 할 일이 없는 김 전 대통령은 홀가분한 입장에서, 미국 측에서 보자면 한국, 한반도의 권익을 스스럼없이 주장하는 악역을 자임하고 나선 셈이다. 아울러 퇴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안보, 국익에 보탬이 되게 활동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다음은 내가 고른 이날 연설의 핵심 단락이다.

"평화는 우리에게 있어서 지상명령이다. 우리 한국 국민은 북한 핵을 단호히 반대하고 이를 철폐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평화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또한 한미동맹을 확고히 지지하고 있다. 평화를 위해서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일부에서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대응에 대해서도 우리 한국 국민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역시 평화를 위해서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힘을 합쳐서 북미 관계가 타개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미국의 일부에서 주장하는 북한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대응에 대해서도 우리 한국 국민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역시 평화를 위해서이다"는 부분이다. 김 전 대통령은 "평화는 지상 명령"이라고 전제한 다음 점차 미국 측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단계적 방법을 택했다.

첫 번째 평화의 조건, 북핵 철폐는 지난 6월15일 남북 공동성명 3주기를 맞아 KBS 일요스페셜 인터뷰에서 밝힌 부분과 다를 게 없다. 두 번째, 한미 동맹에 대한 지지 또한 마찬가지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특히 두 번째 평화의 조건은 세 번째 평화의 조건인 '미국 일부의 대북 강경 노선을 한국민이 우려하고 있다'는 부분을 말하기 위한 사전 포석인 셈이다.

나는 이번 연설의 핵심을 거칠게 풀어서 해석하면 이렇다고 본다.

"부시 행정부 강경파는 대북 강경 노선을 포기하라. 그렇지 않으면 한국민의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적어도 나는 당신들의 방식을 반대한다."

김 전대통령의 이번 언급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압박이라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김 전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노 대통령과 경쟁 관계는 아니다. 그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 못하는 부분, 현 정부가 공개적으로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대미 자주적 자세를 본인이 담당함으로써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또한 광범위한 민주당 지지층에 한반도 평화와 관련해 나아가야 할 노선, 지켜야 할 노선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21일 연설에서 80 고령의 김 전 대통령이 밀림용 낫을 들고 잡목을 헤쳐 나가는 선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한다. 미국과 북한의 온건파가 자신들의 입지 때문에 감히 나서지 못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상처날까 감히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평화에의 도로를 개척하기 위해 한국의 전직 대통령이 나선 것이다.

나는 지난 6월 15일 KBS 인터뷰를 보고 "노 대통령님, 김 전 대통령을 대북 대미 특사로 활용하십시오, 대통령 외교 안보 고문으로 모십시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대한민국의 모든 인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참여 정부가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가운데 김 전대통령은 스스로 그 길에 나섰다. 대미 자주적 자세, 미국내 강경파를 평화의 길로 견인하는 악역을 득표 부담 없는 김대중이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해방과 건국, 그로부터 55년 만에 우리는 이런 공익 봉사형 전직 대통령을 갖게 됐다.

김 전 대통령께, 한반도 평화의 유익함을 미국 일반 국민에게 직접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숲을 두드리면 뱀이 나오고 말을 쏘면 장수를 잡을 수 있다는 옛 이치대로. 그렇다면 우선 미국 유수의 언론과 직접 만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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