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쟁이'와 함께 일본어 배우기

알쏭달쏭 이웃, 일본에서 살기

등록 2003.08.22 12:00수정 2003.08.2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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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흉내쟁이'가 산다. 빨리 어른이 되어 엄마처럼 요리도 하고, 컴퓨터도 하고, 그리고 우주 과학자도 되고, 서커스 단원에 모델도 되고 싶은 흉내쟁이가 산다. 일본어 발음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지는데 한국어 발음엔 여전히 귀여운 아가 발음이 섞여 있는 욕심쟁이·흉내쟁이이다.


여권에 적힌 체류자격이 말해주듯이 4개월된 아이와 나는 그저 '동반가족'의 자격으로 일본 땅에 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당사자인 남편처럼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나는 어린 아이를 둔 처지였으니 일본어 정도 배우고 돌아가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1년 예정의 일본 생활이었으니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그러나 첫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그토록 좌충우돌, 우왕좌왕, 갈팡질팡, 사면초가의 연속일 줄이야!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곳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오로지 남편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그토록 위축시킬 줄이야! 조언을 구할 만한 곳도, 도움을 청할 만한 곳도 없다는 것이 그처럼 답답하고 외로운 것일 줄이야!

처음 몇 개월 동안, 일본어 공부는커녕 아이를 돌보는 일과 새 생활에 적응하는 일만으로도 하루는 너무 짧았고, 몸은 너무 지쳤다. 하는 수 없이 아이와 나란히 누워서 나는 일본어책을 읽었고, 아이는 그 책을 만지면서 함께 놀았다.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누운 채 일본어책을 붙잡고 옹알옹알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의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이 있는데 참 재미있기도 하고 마음이 아리기도 하다.

그렇게 함께 공부했던 덕분인지 자라면서 아이는 공부하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늘 책을 끼고 놀고, 늘 뭔가 끄적이고, 책읽기를 좋아하고, 호기심 많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아이로 자랐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만 2살 즈음엔 사전을 찾아가며 신문을 읽는 나를 흉내내어 식탁에서 공부하고 있는 내 옆자리에 저도 신문지 한 장과 그림책 한 권을 펴놓고 뭔가를 끄적이며 놀았다. 당연히 주의 집중 시간이 짧으니 장난감이 있는 곳과 식탁을 오가며 제 것이 잘 있는지 확인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a 흉내쟁이가 만든 노트북 컴퓨터 - 쵸콜릿이 놓여있던 판을 뒤집으니 멋진 키보드가 되었다.

흉내쟁이가 만든 노트북 컴퓨터 - 쵸콜릿이 놓여있던 판을 뒤집으니 멋진 키보드가 되었다. ⓒ 장영미

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흉내내고 싶어 제 나름대로 여러 개의 노트북 컴퓨터를 만들었다. 먹고 남은 쵸콜릿 상자로 만든 것, 장난감이 들어있던 스티로폼 상자로 만든 것, 두꺼운 도화지에 그린 것 등이 있다. 오로지 제 의지로, 제 판단으로, 제 기술과 아이디어로 만든 것들이다. 성능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으로 늘 내 것을 호시탐탐 노리지만 말이다. 그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급기야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어린이용 장난감 노트북을 선물로 받았다.

a 흉내쟁이의 노트북 컴퓨터

흉내쟁이의 노트북 컴퓨터 ⓒ 장영미

역시 '교육이란 모범을 보이는 것'이란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잔소리나 회초리보다 강한 것이 모범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는 날마다 그리고 매순간 깨닫고 있다. 어쨌든 항상 같이 지내는 엄마의 공부하는 모습은 알게 모르게 아이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나의 일본어 공부는 아이와 놀면서 그리고 아이를 업어 재우면서 틈틈이 하는 것이었다. 눈과 입으로 밖에 할 수 없었고, 쓰는 것은 한참 지난 후에나 가능했다. 남들이 1개월 과정으로 습득한다는 일본어 문법책을 -내가 게으른 탓도 있었지만- 5, 6개월 정도는 본 것 같다. 알 수 없는 기호같기만 했던 글자들이 의미를 가진 문장으로 읽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뻤던지….

10여 년 넘게 공부해 온 영어에 비해 일본어의 습득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일본어를 공부해 본 사람들의 한결같은 반응일 것이다) 단순히 어순이 같아서도 아니고 비슷한 표현이 많아서도 아니다.

한자문화권이라는 것과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인접성과 특수성이 가져다주는 '덤'의 힘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인들이 인접국의 언어를 쉽게 습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흔히들 부딪힌다는 '한자읽기'의 벽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넘을 수 있었다. 워낙 한자에 애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먼저 공부를 시작해 저멀리 앞서갔던 남편의 조언 덕도 컸다. 그리고 일본어 능력 시험 1급에 도전했던 것도 문법 실력을 키우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학원에 다닐 수 있도록 보육원에서 열심히 놀아준 우리 집 흉내쟁이의 공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아이는 일본의 교토에서 언어습득기를 맞았다. 그때부터 한국어와 일본어가 뒤섞인 '짬뽕어'가 탄생했다. 그것도 교토 사투리를 말이다. 집에선 줄곧 한국말을 써왔는데 아이가 보육원에 다니면서부터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보통의 다른 아이들보다 몇 년 앞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아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생활어로서 일본어를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부모로서 아이의 사회생활을 돕기 위해 -비록 실력은 달렸지만-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가 '모국어 가르치기'가 아닐까 싶다. 아이는 점점 생활어로서 현지어를 익혀가는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성장에 중요한 것이어서 모국어 교육은 소홀히할 수 없는 문제이니 말이다. 이 문제는 아이를 키우는 동안 그리고 외국에 사는 한 계속되어질 고민거리일 것이다.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한글교재를 한아름 들고왔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내가 애써서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우리 집 흉내쟁이가 보육원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일본어 흉내를 내준 덕에 오히려 내가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생활 속의 살아있는 일본어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 교토 사투리나 감탄사의 활용법 등은 나보다 흉내쟁이가 한수 위였다.

집에 돌아오면 선생님 흉내를 내어 놀이를 했고, 가상의 친구들과 역할놀이를 했다. 그럴때 는 꼭 일본어로 했다. 보육원에서의 모습도 엿보고, 일본어도 배우고, 내게는 일석이조였다고나 할까.

흉내쟁이의 일본어는 최근 일취월장하여 자연스런 대화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단어나 표현은 내가 훨씬 많이 알고 있지만 역시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조만간 흉내쟁이의 역할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아이에게서 내게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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