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꽃물 예쁘게 물들이던 그 가시나는 지금 어디 살고 있을까이종찬
"니, 퍼뜩 가서 봉숭아꽃 좀 따 온나. 그 중에서 흰 꽃만 골라서 따오야 한다. 알것제?"
"와 예? 또 누가 아풉니꺼?"
"산수골 할매가 인자 죽을 때가 되었는강, 신경통에다 허리가 디기(매우) 아푸단다. 그 병에는 봉숭아 흰 꽃이 그만이거덩."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봉숭아꽃 중에서도 흰꽃을 약재로 사용했다. 특히 남자들보다 여자들의 몸이 아플 때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흰꽃이 아닌 다른 색깔을 지닌 봉숭아꽃들은 독이 들어 있다며 일체 약재로 쓰지 않았다.
이는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이 봉숭아꽃을 장독대나 울 밑에 많이 심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봉숭아는 예로부터 못된 귀신이나 질병을 쫓는 식물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어릴 적에도 봉숭아를 심어둔 그 주변에서 뱀이나 벌레 등을 발견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아나?"
"우와! 너거 집에는 보라색 봉숭아가 이리도 많이 피었더나? 나중에 이 봉숭아 꽃씨도 좀 받아주라. 우리 집에는 흰 색깔뿐이거덩."
우리들은 봉숭아 꽃씨가 싹을 틔워 어느 정도 자라면 봉숭아 줄기만 바라보고도 이 봉숭아가 앞으로 무슨 색깔의 꽃을 피울 것인지 미리 알았다. 봉숭아 줄기 아랫부분을 잘 살펴보면 줄기마다 여러 가지 색깔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줄기 아랫부분에 아무런 색깔도 없는 것이 바로 흰 봉숭아였다.
"그라모 올 가실(가을)에 너거 집 봉숭아 씨앗캉 우리 집 봉숭아 씨앗캉 바까뿌자."
"와?"
"흰 봉숭아 씨앗을 뿌싸가(가루 내어) 잇몸에 바르모 이가 잘 빠진다 카더라."
"니 그거 바를 때 억수로 조심해야 된다카이. 그거 잘못 바르다가는 할매처럼 이빨이 다 빠지는 수도 있다 카더라."
그랬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육고기나 생선을 삶을 때에도 간혹 흰 봉숭화 꽃씨를 몇 개 뿌리기도 했다. 봉숭아 씨앗을 넣으면 고기살이 연해지고 고기뼈가 물렁물렁해진다면서. 또한 애기를 낳을 때에도 산모에게 흰 봉숭아 꽃씨를 빻아 먹였고,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밥상에 오른 생선을 급히 먹다가 생선가시가 목에 걸렸을 때에도 이 꽃씨 가루를 먹으면 금새 괜찮아지기도 했다.
"아나?"
"그기 뭐꼬?"
"니가 좋아하는 보라색 봉숭아 꽃씨다."
"…니…내가 싫나?"
"???"
"니 봉숭아 꽃말이 뭔지 아나? 낼로 건드리지 마라 카는 기다. 그라이 니가 주는 이 꽃씨로 내가 받으모 인자부터 니캉 내캉 빠이빠이 하는 기다."
그날, 그 가시나는 내가 내미는 보라색 봉숭아 꽃씨를 끝내 받지 않았다. 나 또한 그 가시나에게서 끝내 흰 봉숭아 꽃씨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 가시나는 그때 내가 따 준 보라색 봉숭아 꽃잎으로 곱게 물들인 예쁜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때부터 나는 그 가시나의 손톱에서 보라색 봉숭아 꽃물이 빠질 때까지 그 가시나를 한번도 만날 수가 없었다.
봉선화. 그래. 이 꽃에는 슬픈 전설 두 가지가 숨겨져 있다.
때는 삼국시대. 백제 땅에서 살고 있었던 한 여인이 선녀로부터 봉황 한 마리를 받는 꿈을 꾼 뒤 어여쁜 딸을 낳았다. 그 여인은 딸의 이름을 꿈에서 본 봉황과 신선이라는 글씨에서 각각 한 자를 따내서 봉선(鳳仙)이라고 지었다.
봉선이는 자라면서 거문고를 너무나 잘 뜯었다. 마침내 봉선이의 거문고 솜씨는 왕궁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님의 앞에서 거문고를 뜯은 그날, 궁궐에서 돌아온 봉선이는 갑자기 몸이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병석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어느 날, 임금님의 행차가 봉선이의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봉선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거문고를 뜯기 시작했다. 그 거문고 소리를 들은 임금님은 마침내 봉선이의 집으로 행차했다. 그때 거문고를 뜯는 봉선이의 손에서는 붉은 피가 동글동글 맺혀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