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대북송금 특검 사무실에 출두하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연합뉴스
이처럼 이익치 회장은 현대의 비자금을 받은 정치인에게는 '저승사자'이지만 이들을 소추(訴追)하는 검찰에게는 '수호천사'나 다름없다. 이씨는 박지원 전 비서실장에게 현대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이른바 '150억' 사건과, 권노갑 전 민주당 상임고문에게 현대비자금 200억원을 제공했다는 이른바 'α(알파)' 사건의 국내 유일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른바 '현대비자금 150억+α'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대검 중수부가 지난 8월 19일 느닷없이 이 사건의 주요 참고인인 이익치 회장 감싸기에 나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문효남 대검 수사기획관은 이날 브리핑 도중에 "현대쪽에서 이씨를 '배신자'로 본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데, 수사팀에서는 이씨가 본인에게 득이 될 것을 기대해서 진술한 게 아니라 고 정몽헌 회장이 (200억 전달 사실을) 시인하자 이씨도 '대세'를 인정해 따른 면이 많다고 한다"며 "이씨가 처음부터 수사에 기여한 것은 아니다"라고 이씨를 적극 옹호했다. 요컨대 α건을 맨 처음 발설한 이는 이씨가 아니라 정 회장이고, 이씨는 나중에 마지못해 시인했다는 것이다.
문효남 기획관은 검찰이 이처럼 이례적으로 한 참고인의 '입지'에 대해서까지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고 기자들이 묻자 "(언론 보도가) 사실과 달라 이씨가 곤경에 처할 수도 있어서"라며 "수사팀에서 기회가 있으면 설명을 좀 해달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씨의 해명 요청을 받은 검찰이 비난여론의 바다에 빠진 '이익치 구하기'에 나선 셈이다.
그러나 이씨의 행적 및 진술과 관련해서 검찰과 언론이 애써 무시하거나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알다시피 현대비자금 150억+α 의혹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 건은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이 현대 자금의 계좌추적을 하다가 발견한 '별건'이다. 그리고 특검은 지난 6월 25일 대북송금 의혹 사건 수사를 종료하면서 150억+α 건과 관련된 모든 수사자료를 대검 중수부에 넘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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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질심문의 왕자' 이익치
그런데 송두환 특별검사가 법원에 제출한 대북송금 의혹 사건 수사기록에 따르면, 이익치 회장은 이 사건과 관련해 특검이 구속·불구속 기소한 8인(고 정몽헌 회장 포함) 중에서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한 '대질심문의 왕자'이다. 특검 자료를 가지고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는 이씨를 '감싸고' 도는데, 정작 그에 관한 특검 수사기록을 보면 그의 진술을 별로 신뢰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우선 이익치 전 회장은 사실관계를 다투는 핵심 당사자인 박지원 전 비서실장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 한솥밥을 먹었던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 김재수 전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 현대측 인사들과도 낮을 붉히며 대질신문을 해야 했다.
이씨는 대질신문에서 정몽헌 회장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김충식 사장에게 대북송금 2억 불을 언급한 사실 등 자신에게 불리한 혐의에 대해서는 전면 부인으로 일관했다. 또 이씨는 네 번의 남북정상회담 예비회담(접촉)이 열린 싱가포르, 상하이, 베이징 등에 정몽헌 회장을 수행해 모두 참석해 현대가 대북사업의 대가로 북측에 5억달러(현물 5000만 달러 포함)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현장에 있었으면서도, "대북사업과 관련된 창구는 김윤규 사장이 하였기 때문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그 책임을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에게 전가했다.
심지어 현대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는 평소에 여러 대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며 현대의 대북사업 및 송금과 관련해 박지원 장관, 임동원 국정원장 등과 수 차례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었으면서도 특검 조사에서는 '휴대폰이 없다'고 시치미를 뗐다.
이씨가 현대비자금에서 건네진 CD(양도성예금증서) 150억원 건과 관련, 김재수 전 현대건설 부사장 겸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대질신문을 받을 때는 이씨가 김씨의 진술을 아예 '모르쇠'로 일관하자, 특검팀 검사가 "진술인은 양도성예금증서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는가요"라고 묻자 "잘 모릅니다"로 답하는 웃지 못할 장면까지 연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