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중심이었던 서울운동장서울시
기어이 서울까지 와서 끌고 내려와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으니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도시로 내뺀다. 그래서 낯선 이역(異域) 천리 서울, 수원, 성남, 광명, 안산, 안양, 부산, 대구, 울산, 포항, 마산 등지로 떠났다. 처녀 총각들은 공장에 마련된 서너 평 이내의 기숙사에 새우잠을 잤다.
공중변소가 생길 무렵이 이때다. 너도나도 산동네, 천막촌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삼양동, 미아리 일대와 신당동, 봉천동이 그곳이요, 성남 상대원동이 ‘광주대단지 사건’의 계기가 되듯 물밀듯이 들어와 천막치고 아무 데나 깃발 꽂고 살았다.
서울에 가면 뭔가 대단한 돈벌이나 근사한 행세라도 하는 것처럼 떠벌리는 이도 많았다. 뿐인가? 말투도 6개월이 안되어 ‘그랬니? 어쨌니? 저쨌니?’ ‘얘는...’ ‘네’나 ‘녜'로 근사하게 바뀌어 온다. ‘거시기’와 ‘시방’이라는 전라도 공용어는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
서울 수돗물을 먹으면 까만 살갗은 2달이면 뽀얗게 된다. 그러나 그 뿐이다. 햇볕을 얼마나 볼 수 없게 일을 부려먹었는지 살결은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다. 식수에 표백제라도 탔던 걸까?
부모님 안심시켜 드리려고 ‘엄마, 직원이 저 밑에 50명이 넘어요’ 하는 말에 어른들은 동네방네 한 마디 씩 툭툭 뱉으며 자랑하고 다닌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아주머니들은 자신의 자식과 비교하면서 열 불이 나고 화병(火病)이 도지기도 했다.
소위 ‘3D 업종’이라 불리던 생산직, 노가다(건설 일용직), 버스 차장, 식모와 보이(뽀이)가 다수였던 산업통계를 들추지 않더라도 그 때 그 사람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런데도 거짓을 일삼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수구초심(首邱初心), 귀향(歸鄕)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