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에도 많은 영혼들을 위해

나의 묵주기도 지향들

등록 2003.09.08 13:06수정 2003.09.0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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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의 명산 백화산(白華山)을 거의 매일 오르고 내리면서 요즘은 묵주기도를 30단씩 바친다. 오르면서 15단, 내려오면서 15단씩을 바치니 나의 백화산 등산은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일찍부터 나의 산행은 두 가지 목적이었다. 건강 관리와 기도….


오로지 건강 관리만을 위해서 등산을 한다면 뭔가 허전하고, 산행의 의미는 아무래도 반감이 될 터이다. 때로는 몸이 피곤하고 귀찮은 생각에 오늘은 등산을 그만둘까 하다가도 기도를 해야 한다는, 기도에 대한 일종의 의무감 때문에 산행을 하기도 한다. 비가 오는 날도 우산을 쓰고서라도 등산을 하는데,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묵주를 들고 산행을 할 때의 기분은 좀더 색다르다.

어려운 조건에도 건강 관리와 기도, 그 일석이조를 위해 산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기도의 힘'이고 '은총'의 실체임을 자각하곤 한다. 비 오는 날에도 양손에 우산과 묵주를 쥐고 산행을 하는 내 삶의 과정, 오늘의 이 도정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하고도 의미로운 것임을 새삼 깨닫곤 하는 것이다.

백화산은 높이가 해발 284미터밖에 되지 않는, 높이만을 따지면 별로 신통할 게 없는 산이다. 하지만 백화산은 태안이라는 동네가 참으로 복된 고장임을 그대로 실증해 주는 존재이고, 백화산을 찾는 수많은 외지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산 위에서 만끽할 수 있는 풍광 감상은 말할 것도 없고, 산책을 겸한 등산, 적당한 운동을 위한 산행으로는 안성맞춤의 산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그 백화산이 내게는 오르고 내리며 기도를 하기 똑 좋은 산이기도 하니, 누구보다도 산의 혜택을 많이 누리고 사는 셈이다.

나는 백화산 정상에 오르면 15단 째의 묵주기도를 끝낸 다음 맨손체조와 적당한 바위에 몸 부딪치기를 한다. 그러고 나면 정상을 맴돌며 묵주기도 2단을 한다. 백화산 정상을 이내 내려가기가 싫어서이기도 하지만, 태을암 근처 너럭바위에서 맨발로 바위 위를 돌며 하는 2단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야 '백화산 묵주기도 30단'을 채울 수 있다.

생각하면 백화산을 오르고 내리며 묵주기도를 바쳐온 세월이 20년도 넘었다. 1970년대 중후반 5년 동안의 객지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1980년 가을 고향으로 돌아와 살기 시작한 후부터 나의 '백화산 묵주기도'도 시작되었다.


그때의 내 묵주기도는 '광주사태'로 불린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영혼을 위한 것이 제1지향이었다. 다음은 부상당한 이들, 구금당했거나 수배중인 이들, 광주에 투입되어 희생당한 군인들, 그리고 모든 광주시민들을 위한 지향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런 지향으로 참으로 열심히 묵주기도를 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오후에 등산을 하지 않고 매일같이 이른 아침에 산행을 했다. 먼 가야산 쪽에서 붉게 피어오르는 먼동을 보면서, 그리고 찬란한 아침햇살을 가슴 가득 안으며 참으로 절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1982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광주의 비극'을 간접적으로 다룬 '추상의 늪'을 응모했을 때는, 아니, 그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 노고와 비원의 현실적 보람을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다.

그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작품의 내용상 도저히 당선될 수 없는 작품이 심사위원들의 용기 발휘로 뽑힐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침마다 백화산을 오르며 간절히 바쳤던 묵주기도 덕분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의 백화산 등산은 줄기차게 지속되지 못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함부로 내돌리며 사는 세월이 한참이나 이어졌고, 가끔씩 산을 오르는 일은 그야말로 간헐적인 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간헐적으로 등산을 할 때도 내 손에는 으레 묵주가 쥐어지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통풍과 당뇨에 걸려 건강을 잃은 다음에서야, 즉 1998년부터 내 매일의 백화산 등산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나의 '백화산 묵주기도'는 오늘까지 변함이 없다.

그 동안 나의 묵주기도 지향은 참으로 다양했다. 1970년대 후반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에 거의 매번 참석하며 '박정희씨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80년대에는 백화산을 오르며 '전두환씨와 정치군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1990년대 중반 역사의 단죄를 받고서도, 불상 앞에서 불자의 모습을 취하면서도 전혀 참회하지 않고 국가에 내놓아야 할 부정 축재한 돈도 이리저리 자라목처럼 감추기만 하는 전두환씨를 볼 때는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내 묵주기도의 갖가지 지향들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지향과 '정치인들'을 위한 지향이 가장 많았던 것 같다. 정치인들을 위해 많이 기도한 것은 어느 분야보다도 정치인들의 양심과 자질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역감정 극복'을 위한 기도, '이데올로기 극복'을 위한 기도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지향들을 과거형으로 기술하는 것은, 오늘에는 그 지향들이 내 '백화산 묵주기도 30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기도 지향의 지속은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김영삼 문민정부'를 위한 지향과 '김대중 국민의 정부'를 위한 지향으로 기도한 시절도 있었고, 지금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위한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 2001년 여름부터 계속해왔던 '친일 친독재 족벌언론 조선일보의 회개'를 위한 기도는 잠시 쉬고 있다.

옛날에는 내 '백화산 묵주기도'가 10단으로 그친 적도 있었고, 20단으로 붙박인 시절도 있었지만, 올해부터는 완전히 30단으로 거의 고정이 된 상태다. 어떤 코스로 해서 어떤 방식으로 산행을 하면 정확히 30단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덕이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는 몇 단 하는 식으로, 묵주기도 진행 구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오늘의 묵주기도 30단 지향들을 보면 20여 년 동안 변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도 있고, 몇 년 전부터 지향 목록에 오른 것들과 최근에 시작한 것들도 있다. 지속적인 것들이 있는 반면에 한시적인 것들도 있는데, 한시적인 지향들이 있다는 것은 국가적 사회적 상황이나 내 신상과 주변의 어떤 변화 또는 사안에 따라 한때 지향 목록에 추가되었던 것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터이다.

그런데 나는 어떤 지향들에 대해서는 그것을 묵주기도의 지향으로만 묶어두지 않는다. 그 지향을 '축복미사'나 '위령미사'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축복미사보다는 위령미사가 훨씬 많은데, 위령미사도 개별 미사보다는 주로 추석이나 설 명절에 지내는 '합동위령미사'를 활용하는 편이다.

이제 또 한해 추석을 맞는다. 올 추석에도 나는 많은 영혼들을 위해 합동위령미사를 봉헌하려고 한다. 세상 떠난 영혼들의 이름을 여럿 쓸 수 있는, 다섯 개의 줄이 그려져 있는 미사예물 봉투를 네 장 준비했다. 친가, 외가, 처가로 나누어 우선 세 장의 봉투에다 여러 영혼들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나머지 한 장에는 지난해 여름 내 당질이 운명했을 때 자기 일처럼 많은 일을 해주고 한 달 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문제성이라는 사람, 나로 하여금 인터넷 상에서 군대내 의문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던 강의택 하사, 지난 5월 카이스트 폭발사고로 숨진 조정훈 연구원, 얼마 전에 이곳 태안에서 엄마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 자매 어린이들의 이름을 썼다. 문제성씨를 제외하고는 내가 생전에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이름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또 네 장의 미사예물 봉투에 씌어진 이름들 중에 생전에 천주교 신자로 사신 분들은 내 선친과 외할머님 뿐이다. 대세(代洗)라도 받고 죽은 이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천주교 신앙과 전혀 관계없이 살았던 이들이다. 그래도 나는 위령미사의 은혜가 그들에게 나누어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네 장의 미사예물 봉투를 미리 일찌감치 성당 사무실에 맡긴 다음 나는 다시 백화산을 올랐다. 내 묵주기도의 지향들이 좀더 명료해지는 느낌이었다. 묵주기도의 지향들을 추석합동위령미사로 승화시킨 사실이 내 기도의 진실성과 어떤 효과를 넉넉히 떠받쳐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나는 올해도 추석날 오후에는 백화산을 오를 것이다. 내 '백화산 묵주기도 30단'의 지향을 다시금 내 가슴에 아로새기고 하늘에 펴 올리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추석을 좀더 잘 살게 하는 일이기에….

내 글을 즐겨 읽고 내 삶의 방식을 좋게 보아주시는 분들께 내 '백화산 묵주기도 30'단의 지향들을 소개해 드리며 이 글을 맺는다.


백화산 묵주기도 30단 지향

1. 세계 평화와 최강대국 미국의 바른 선택을 위하여
2, 우리나라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를 위하여
3. 태안교회 공동체와 태안 지역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4. 선친 지동환 안셀모님의 영혼과 모든 조상, 친척, 친지들과 모든 은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5. 저의 부모, 형제, 친척, 친지들과 모든 은인들의 가정을 위하여

6. 저의 가정과 가족공동체를 위하여
7. 제 어머니의 건강의 회복과 만수무강, 장인 어른의 만수무강과 처할머니의 편안한 여생을 위하여
8.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 동포들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9.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는 모든 장애인들을 위하여
10. 지뢰 폭발사고로 부상당한 강원도 인제의 한 소년과 제 이웃 장애인 남태현을 위하여

11. 대구지하철 참사 영혼들과 유가족들을 위하여
12. 천안에서 화재사고와 교통사고로 숨진 어린 영혼들과 다친 어린이들, 유가족들을 위하여
13. 갖가지 불의의 사고로 숨진 모든 이들과 다친 이들, 유가족들을 위하여
14. 이라크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과 다친 이들, 유가족, 현재 이라크에 있는 군인들과 이라크 국민들을 위하여
15. 세계 각처 분쟁 지역에서 숨진 이들의 영혼과 다친 이들, 유가족들, 그 곳의 주민들을 위하여

16.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숨진 이들과 가족을 모두 잃은 이를 비롯한 유가족들을 위하여
17. 1998년 여름 지리산 계곡의 수해로 숨진 이들과 가족을 모두 잃은 이를 비롯한 유가족들을 위하여
18. 2003년 봄 서산 음암저수지에서 숨진 가족과 가족을 모두 잃은 사람을 위하여
19. 군대에서 의문사한 모든 장병들과 유가족들을 위하여
20. 최근 태안에서 어머니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한 자매 어린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21. 올해 세상을 뜨신 제 장모님의 영혼을 위하여
22. 최근의 카이스트 폭발사고로 숨진 조정훈 연구원과 부상당한 동료 연구원을 위하여
23.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조동길 교수의 가정을 위하여
24. 최근 스스로 세상을 떠난 현대아산 회장 정몽헌의 영혼과 유족을 위하여
25.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든 이들과 동반 자살로 희생당한 어린 영혼들을 위하여

26. '꽃동네'를 비롯한 사회복지 시설에서 사는 이들, 봉사자들, 무의탁 독거 노인들, 소년가장들과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27.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외국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정을 위하여
28. 세상 떠난 저의 대부 대자들의 영혼과 그 가정, 모든 대자들의 신앙과 가정을 위하여
29. 저의 모든 은사님들과 학창 시절의 모든 동기생들을 위하여
30. 제가 참여하고 있는 신앙단체, 문학단체, 사회단체, 친목단체들의 건실한 운영과 모든 구성원들을 위하여


*한시적인 부첨 지향

(태안교회 공동체의 성전 건립을 위하여)


*마무리 지향

(교회의 모든 성직자 수도자들을 위하여. 저의 건강과 근면 성실과 문학의 성취를 위하여. 제가 기획하고 실행하는 모든 일들의 옳은 가치와 성과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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