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진 교정에서

어린 날의 기억을 찾아 가는 길(7)

등록 2003.09.08 15:06수정 2003.09.08 16:2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들 웃음 소리 사라진 잡초만 무성한 운동장
아이들 웃음 소리 사라진 잡초만 무성한 운동장최성수
세월은 정말 흘러가는 것일까? 어떤 곳에서는 세월이 멈춰 서서 우리에게, 너무 빨리 걸어가지는 말라고, 쉬엄쉬엄 가는 삶의 길이 아름다울 때도 있다고 속삭이기도 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 고3인 우리 큰 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이니까 벌써 17~18년 전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 가족은 그 때 나들이 삼아 고향 집 근처의 물안리 저수지에 간 적이 있었는데, 빠져들라고 유혹하는 듯 시퍼렇게 짙은 물빛을 구경하고, 보리소골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걸어서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리는 그 길을 한 20여 분 걷던 아들 녀석이 개울가에서 잠시 쉬다가 이렇게 제 할머니에게 입을 열었다.

“할머니 나 커서 아주 큰 버스를 살 거야. 우리 가족들 다 타고 다닐 수 있게.”

아마도 녀석은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소리를 했을 게다. 녀석이 그런 말을 하며 앉아 물장난을 하던 그 개울 건너에는 바라보기만 해도 순한 느낌이 드는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그 학교에서 손풍금 소리가 들렸던 것처럼 생각되는 까닭은 개울에 안길 듯 자리 잡고 있는 학교의 풍경 때문이었을까? 그 학교 이름은 안흥초등학교 상안 분교였다.

빗물만 고인 웅덩이에 옛날 아이들 얼굴이 되비치기나 할까
빗물만 고인 웅덩이에 옛날 아이들 얼굴이 되비치기나 할까최성수
물론 나는 상안 분교를 다니지는 않았다. 내가 다닌 학교는 본교였던 안흥 초등학교였다. 상안 1리 아이들은 본교에, 상안 2리부터는 상안 분교에 다녔으니, 1리에 살던 나는 본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손바닥만한 시골 마을에 행정적으로 갈라놓은 리나 반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윗마을 분교 아이들과도 수시로 어울리기도 했다.


그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난 여름 찾아간 상안 분교는 이제는 폐교인 채로 시간 속에 버려져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 웃음 소리 재잘거리며 시냇물처럼 흘러가던 곳, 그러나 이제는 그 웃음소리를 솔바람 소리가 대신 하는 쓸쓸한 곳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지던 운동장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어제 내린 비로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남아 지나간 세월의 아이들 얼굴을 옛 우물처럼 되비치고 있는 곳. 상안 분교는 마치 버려진 성터처럼 덩그마니 남아 있었다.


누군가 써 놓은 칠판의 이름들을 혼자 남아 지키는 교실
누군가 써 놓은 칠판의 이름들을 혼자 남아 지키는 교실최성수
그 시절은 정녕 흘러가 버리고 없는 것일까? 아니 세월은 세상 밖에서는 흐르고, 이곳에서는 남아 제가 걸어온 길속으로 침잠하고 있는 것일까? 한때는 아침 체조 소리와 애국가가 울려 퍼졌을 조회대는 풀숲에 아랫도리가 다 묻혀 버렸고, 운동회도 학예회도 추억이 되어 텅 빈 교실에 남아 있는 곳. 상안 초등학교에는 그렇게 지난 세월이 고여 있다.

교실 창 밖, 소나무만 자라 빈 교실을 기웃거리고 있다
교실 창 밖, 소나무만 자라 빈 교실을 기웃거리고 있다최성수
아이들의 노랫소리로 싱그러웠을 임간 교실에 이제는 솔바람소리만 찰랑대고, 운동장을 달리던 아이들의 타는 갈증을 씻어주던 수돗가는 회칠이 벗겨지고 수도꼭지는 사라진 채 버려져 있다. 이제 누가 남아 여기가 아이들의 싱그러운 시절이 피어나던 곳이라고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칠판에 쓰인 ‘태우, 인교, 덕환, 사랑해’, 그 글씨조차 덧없고 쓸쓸하다.

숲속 교실. 아이들은 없고 잡초만 우거져 있다.
숲속 교실. 아이들은 없고 잡초만 우거져 있다.최성수
창 밖으로 소나무만 빈 세월만큼 자라, 노랫소리도 재잘거림도 사라진 교실을 기웃거릴 뿐, 세상의 바쁜 걸음에서 빗겨난 폐교는 세상의 방관자처럼 그저 지나가는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한때는 광기 어린 시대의 슬픈 상징이었던 이승복 동상도 칠이 벗겨진 채 허허로이 서 있는 교정,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익어가던 돌배 나무는 기운이 다 빠진 채 익는 일도 덧없다는 듯 작은 키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돌보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우거진 학교 정원의 나무들
돌보는 사람 없이 저 혼자 우거진 학교 정원의 나무들최성수
어쩌다 찾아든 나 같은 길손에게, 상안 초등학교는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너희들이 바쁜 세상일에 쫓겨 무심히 지나간 길모퉁이, 이렇게 남아 먼지처럼 스러지는 것들도 있다.’고.

무언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것 같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교문을 벗어나는 내게, 작은 게시판에는 슬픈 이 학교의 마지막 모습인양, 이런 글귀가 써 있다.

저 혼자 꽃 피우고 저 혼자 익어가는 돌배나무
저 혼자 꽃 피우고 저 혼자 익어가는 돌배나무최성수
“횡성군 안흥면 상안리 517-2번지에 자리 잡은 이곳은, 삼백예순날 웃음소리와 노래 소리로 메아리지던 옛 상안국민학교가 자리했던 곳으로 이 나라의 내일을 걸머질 미래의 동량들이 오순도순 고운 꿈을 엮어가던 배움의 요람이었습니다. 곧고 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 사회 각계 각층에서 당당히 제 몫을 다해가고 있는 졸업생들의 큰 뜻이 살아 숨쉬는 이 고장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이었기에 우리 모두는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1962년 4월 1일 개교하여 28회에 걸쳐 64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농촌 인구 감소에 따라 1995년 3월 1일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 향토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우리 모두의 꿈밭이었기에, 아끼고 보존하는 리에 모두가 앞장서 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그 글을 읽는 내 귓가에 아련하게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세월의 광기에서 이제는 빗겨나 서있는 이승복 동상
세월의 광기에서 이제는 빗겨나 서있는 이승복 동상최성수
미루나무 따라 큰길 따라/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따라/시냇물을 따라 한참을 가면/어려서 내가 다니던 우리학교/작은 동산 위에 올라보면/우리학교 한눈에 다 보이네/세상에서 제일 좋은 학교/같이 놀았던 친구/어디서 무얼 하든지/가슴에 가득 꿈을 안고 살아라 음음/선생님 가르쳐주신 그때 그 말씀 잊지 않아요/언제나 그렇듯이 비 개이고 나면/무지개가 뜬다/결석은 하지 말아라/공부를 해야 좋은사람 된단다 음음/선생님 가르쳐주신 그때 그 말씀 잊지 않아요/언제나 그렇듯이 비 개이고 나면/무지개가 뜬다(영화 <선생 김봉두>의 삽입곡 양희은의 <내 어린 날의 학교>)

문도 뜯긴 채 학교 정원과 마주한 복도
문도 뜯긴 채 학교 정원과 마주한 복도최성수

수돗가. 수도도 없고 칠도 벗겨진 채 없어진 아이들처럼 메말라 있는 곳
수돗가. 수도도 없고 칠도 벗겨진 채 없어진 아이들처럼 메말라 있는 곳최성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2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3. 3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4. 4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5. 5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한강 '채식주의자'  폐기 권고...경기교육청 논란되자 "학교가 판단"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