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없는 우리의 이상향 '유토피아'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등록 2003.09.13 12:50수정 2003.09.1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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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 문명의 급격한 발달로 인하여 현대인들은 다양한 정보의 공유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고 있다. 물론 상대적 박탈감을 덜 느끼는 사람들에 한해서지만 대체로 고품질의 삶을 향유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능력에 따라 필요한 재화를 지불하고 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광섬유의 눈부신 발전으로 조급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건충족이 된다면 지구촌 곳곳을 빠른 시간 안에 돌아 볼 수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현대인들은 그러한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대가로 좀 더 복잡하고 다양화된 제도에 따를 것을 강제 받게 되었다. 사회는 무한 경쟁체제로 전환되면서 개인 중심적인 사고가 인간의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성을 잊어버리게 하며 이기심의 팽창이 더불어 사는 편안함을 거부했다.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는 질서라는 구속력을 매개로 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종속관계를 형성했으며 그러한 관계를 통하여 역지배의 현상과 빈부의 격차를 넓혀 놓기도 했다.

제도로부터의 일탈은 없는 것일까.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누리며 사는 이상향은 없는 것일까.

일탈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이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로 'ou(no- 없다. 아니다)'와 'topia(place-장소, 나라)'의 합성어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현실에서 존재하지 나라나 장소를 뜻한다. 유토피아라는 합성어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토머스 모어다

토머스 모어는 15세기의 인물로 사상가며 정치가다. 그는 당시 영국에서 붐을 이루던 농지를 초지로 변형시키는 운동에 충격을 받았다.


농산물보다 양모를 수출해서 얻는 수입이 월등하였으므로 당시의 지주들은 농사를 짓던 소작인들을 내 좇고 농지를 목축지로 바꾸는데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었다.

영주나 지주들의 탐욕으로 인해 대대로 소작을 하며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고향을 잃고 걸식을 하거나 거리의 부랑아로 전락하였다.


제도가 국민을 고통속으로 몰아 넣는 것을 본 모어는 이러한 소외계층의 아픔을 소설을 통하여 나타내려 하였으며 그러한 과정을 거쳐 세상에 얼굴을 들어낸 책 제목이 <유토피아>다.

소설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유토피아는 당시 영국의 주 숫자와 같은 54개의 도시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별로 6000세대가 거주하게 만든 계획도시지만 도시를 관장하는 군주는 없다.

국민의 1%가 관리나 성직자가 되어 노동에서 제외되나, 나머지 99%의 국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루에 여섯시간씩 노동에 종사하여야 한다. 선택된 국민의 1%도 2년에 한번씩 순번제로 돌아가며 맡기 때문에 불만은 없다.

국민은 근로시간 외에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며 월 2번의 휴일을 즐길 수 있다.

공동재산제도라 화폐는 통용되지 않으며 일상생활에 별로 효용이 없는 금이나 은은 가장 천한 쓰임 새, 즉 요강이나 변기를 만드는데 사용하고 식기는 도기로 빚어 사용한다.

생산물은 모두 공동창고에 보관하며, 자기가 생산하지 않은 필요물품은 필요로 하는 만큼 공동창고에 가서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으므로 부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는 22세, 여자는 18세가 되면 결혼을 하고 교육은 복잡한 수학이나 논리학은 배울 필요가 없고 심성을 향상하는 문화나 예술과목에 치중한다.

병든 사람은 나라에서 고쳐주고 전쟁을 싫어한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가능하면 지혜로 굴복시켜야 하지만, 최악의 경우는 용병을 사거나 노예를 시켜 적을 물리친다.

종교의 자유도 무제한이라서 태양을 숭배하던가 달을 숭배하던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옷도 비슷하게 입어 옷모양으로 차별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완전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유토피아는 전 국민이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삶의 질을 누리는 평등한 세상임에 틀림없다. 나라에서 알아서 다해주니 의무만 지키면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가 없으니 돈 벌 걱정안하고, 모두 다 닮은 꼴로 살아가니 상대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의복도 같고 음식도 같다. 놀 때 같이 놀고 일할 때 같이 일하니 실직의 위험이 없고 때가 되면 결혼하니 짝을 찾는 허덕임에서 벗어나는 여유도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공산주의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는 정말 삶의 질을 골고루 향상시키는 우리의 이상향일까. 나의 대답은 '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모순과 괴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그냥 말 그대로 유토피아일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은 아니다. 먼저 유토피아 국민들은 평생동안 똑같은 복장으로 산다. 개인의 체형을 고려하지 않음은 물론 개성이 말살된 것이다

개인의 기호와 식성을 획일화 규정화한 공동식사는 수용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또한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가능한 여행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인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록 본인이 원하면 보내준다고 했지만, 노예를 사온다거나 전쟁포로를 노예로 삼을 수 있다는 법률제도는 만인의 평등과 인본사상에 위배되며 또 다른 인종차별과 계급사회가 형성됨을 알 수 있다.

유토피아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이 10명에서 16명을 초과하거나 줄어들면 다른 가정에서 데려오거나 보내는 비인륜적인 제도도 평등과 분배라는 이름으로 있으며 결혼연령을 위반했을 때 처벌하는 조항도 있다.

토머스 모어는 제도로부터 억압받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공평한 세상을 소설로 나타내려 했지만, 결국은 또 다른 제도를 만드는 우를 범하고 마는 것이 유토피아다.

나름대로 평등한 사회를 그려보려 노력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만인이 평등하고 골고루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사회가 있는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유토피아가 아닐까 싶다.

모순은 잠시 가려질 뿐이지 뒤집는다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가정이 있으면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으면 자식이 있다. 그렇게 서열이 정해지며 위계질서가 형성되는게 사회다.

만인이 평등하게 계급없는 사회에서 살기를 소망하던 우리의 유토피아, 그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안에서만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서해문집,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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