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할 2푼 5리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슈퍼'하지 않은 평범함이 주는 의미

등록 2003.09.14 17:28수정 2003.09.16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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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신문사

팀 최다 실점, 시즌 최소 득점, 1게임 최다 피안타, 팀 최다 홈런 허용, 최다 사사구 허용, 시즌 최다 병살타 등 그야말로 프로야구팀에 있어서 가히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5년 청보 핀토스로 매각되기까지 1983년 한해를 제외하고는 만년 꼴찌였다. 실존했던 이 ‘괴짜’ 구단을 소재로 80년대를 비치는 유쾌한 후일담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출간되었다.

제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품인 이 소설은 이미 <지구영웅전설>로 독특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구성으로 독자들을 즐겁게 했던 박민규의 새로운 작품이다. 특히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엘리트 학생복지와 국풍 81, 댄스 그룹 둘리스, 그리고 민병철 생활영어 등 80년대를 회고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시대적 소품들로 ‘복고적’ 배경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다.


“그해의 프로야구를 생각하면, 나는 도무지 삼미 슈퍼스타즈를 잊을 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야구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것이었고, 또 그런 이유로 야구를 꽤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 나는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꿈많은 소년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그 해, 드디어 ‘프로야구’가 개막한다. 집이 있는 인천에 연고지를 둔 삼미 슈퍼스타즈는 곧 나의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해마다 연전연패하는 팀을 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승리보다는 패배를 느끼는 날이 많아지면서 유년시절은 그렇게 흘렀다.

나는 아침이면 학교를 가고, 리포트를 내라면 내고, 출석을 부르면 대답을 하고, 시험을 치라면 치는 무료한 대학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단짝이었던 조성훈과 조우하면서 잊었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떠올린다. 나는 조성훈의 말에서 늘 패배만 하던 팀으로 기억하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슈퍼’하지 않은 평범함이 주는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 나간다.

시간이 흘러,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나는 결국 인원 감축으로 다니던 회사에서 퇴출당하고 만다. 가정에 소홀히 한 내게 아내마저 이혼으로 떠난 집은 그야말로 외롭기만 하다. 그러던 차에, 소리없이 일본으로 떠났던 조성훈이 돌아온다. 앞만 보고 달렸던 내게 찾아볼 수 없는 여유를 알게 해주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만들면서 비로소 나는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

작가는 시종 개그처럼 능수능란하고 경쾌한 입심으로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만이 프로로 인정받는 경쟁사회의 서늘한 진실임을 매섭게 꼬집는다. 이러한 서사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박민규만의 독특한 문체가 가지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게시판 글쓰기와도 같은 속도감있고 밀도 있는 문장, 만화적 상상력과 하루키를 연상케 하는 낭만적 모티브는 소설이 줄 수 있는 모든 재미를 한꺼번에 선사하고 있다.


이 대목은 90년대 쏟아지기 시작해 지금은 그 흔적이 묘연한 ‘신세대문학’ 그리고 기성작가들의 고전적 글쓰기와 일정한 선을 긋고 있으면서도 그 진중함과 소설적 가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예감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럼,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게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참으로 운 좋게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야. 삼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리고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표해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조성훈의 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진실은 바로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라는 평범한 진리다. 즉, 삼미의 정신은 ‘프로’가 득세하는 현실을 깨고 보다 현실적인 능력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창출한다. 그것은 불사조 ‘박철순’의 고장난 허리가 이룩한 22연승이나 ‘헐크’ 이만수의 장쾌한 홈런은 절대 깨달을 수 없는 경지다.

일류대학에 진학해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IMF의 여파로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 주인공, 분식점 주인이 된 직장동료, 프라모델 숍을 열게 된 절친한 단짝친구, 부랑자 생활을 하다 삼미팀에게 매료되어 멀리 이국땅까지 날아온 일본인 등 삼미 슈퍼스타즈가 세운 불멸의 기록만큼이나 화려한 이력을 가진 ‘주변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쟁과 죽음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사회와 만나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무시로 드나들던 불안의 기운을 떨쳐내고 소중히 접은 인생의 한 귀퉁이에 ‘지면 어때?’라고 당당하게 반문할 수 있는 자신감이야말로 지금은 사라진 1할 2푼 5리의 승률을 자랑하는 삼미 슈퍼스타즈가 독자들에게 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한겨레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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