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의 마루의 창

창이 있는 풍경 12

등록 2003.09.15 09:16수정 2003.09.1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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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도산서원을 다시 찾았습니다. 작년 5월에도 청량사를 돌아보고 청량산을 등반한 다음 이곳에 왔습니다. 트럭 얻어 타고 싱그러운 5월의 시골길을 달려 온혜읍에 도착한 다음 시원한 냉콩국수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느긋하게 버스를 탔습니다. 도산서원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고 한적한 곳에 있었고 관람객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올해 휴가를 보내면서 꼭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세월을 넘나드는 창들을 만났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머물던 도산서당. 유생들의 거처인 농운정사, 강당인 전교당, 하인들의 거처인 고직사, 사당인 상덕사 등을 비롯해 여러 가옥들이 경사진 언덕 길 좌우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단연 이곳에서 정이 가는 곳은 도산서당입니다. 생전에 퇴계 선생이 직접 지었다는 이 아담한 거처에 들어오면 그리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문짝 없는 문을 들어서면 작은 마당이 있고 연못과 얕은 담장이 있습니다. 이곳 마루 암서헌에 앉아 발을 쉬게 합니다.

도산서원 내 도산서당의 암서헌 창. 암서헌은 마루의 이름이다. 창 밖으로 햇빛을 머금은 꽃들이 화사하게 웃고 있다. 암서헌의 창은 나비가 드나들 수 있는 창, 현실과 이상의 넘나듦을 자유로이 허용하는 관용의 창이다.
도산서원 내 도산서당의 암서헌 창. 암서헌은 마루의 이름이다. 창 밖으로 햇빛을 머금은 꽃들이 화사하게 웃고 있다. 암서헌의 창은 나비가 드나들 수 있는 창, 현실과 이상의 넘나듦을 자유로이 허용하는 관용의 창이다.박태신
암서헌 뒤로 고즈넉한 창이 뒤 뜨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뒤 뜨락으로 가보지 않아 창에 문짝이 달렸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왠지 문짝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갔을 때마다 마루에 앉아 평온한 휴식을 취할 마음만이 들었습니다. 문짝이 있건 없건 이 창은 사계절의 변화를 24시간 365일 생중계하는 브라운관 같은 틀을 가진 창입니다. 작년에 총총 피어있던 꽃은 올해에는 없었습니다

창은 그 틀에 변함이 없어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보는 이에 따라 계절에 따라 변합니다. 새들도 나비와 벌들도 드나들기도 할 그 창은 세월을 넘나드는 곳입니다. 창만 넘으면 과거로 건너갈 것 같은 그런 창, 그리고 과거의 기운이 쉬이 넘어올 것 같은 창. 그래서 지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정성으로 지은 집, 자연과 어울리게 지은 집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곳에서는 휴식과 공부가 공존하고 스승과 제자가 공존합니다. 퇴계 선생이 암서헌 창 옆에 자리잡고서 가르침을 전하고 그 유생들이 둘러앉은 모습을 상상합니다.

창은 하나의 경계입니다. 그러나 긴장감 없는 경계입니다. 막(문짝) 없는 창이 가장 좋은 창일지도 모릅니다. 가까운 사람 사이에도 서로 존중해 주는, 그러나 긴장감은 없는, 막 없는 창이 필요합니다.

농운정사의 한쪽 마루방인 관란헌의 창 밖에서 바라본 맞은편 마루방 시습재. 관란헌은 '물결 흘러가는 것을 감상하는 곳'이라는 뜻을, 시습재는 '시시때때로 학습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 시습재의 창은 스승이 있는 도산서당을 향해 있다.
농운정사의 한쪽 마루방인 관란헌의 창 밖에서 바라본 맞은편 마루방 시습재. 관란헌은 '물결 흘러가는 것을 감상하는 곳'이라는 뜻을, 시습재는 '시시때때로 학습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녔다. 시습재의 창은 스승이 있는 도산서당을 향해 있다.박태신
농운정사는 창이 참 많습니다. 농운정사는 유생들이 공부도 하고 휴식도 갖고 잠도 자는 곳입니다. '공'(工)자를 90도 돌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획에 해당하는 곳은 방이고 양쪽 획은 공부방이나 휴식처가 되는 마루방입니다. '관란헌'(觀瀾軒)과 '시습재'(時習齋)라고 합니다. 관란헌 서쪽 창 밖에서 관란헌과 시습재 마루방을 봅니다. 이곳도 휴식과 공부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창이 창을 마주합니다. 문짝을 열어제치고 만납니다. 서로 서로 창 밖 전경을 보여주며 대화합니다. 문짝이 닫히는 밤에는 서로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요. 처마에서 우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감상하면서요.


하인들의 거처인 상고직사도 둘러봅니다. 상고직사는 중앙에 마루를 둔 'ㅁ자'형을 하고 있습니다. 'ㅁ'자형이라 답답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개방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 이유는 마루에 앉아 보면 드넓은 하늘이 올려다 보이고, 사방으로 문이나 창이 나 있어 기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쪽의 대문, 남쪽의 출입문과 부뚜막 옆 창, 서쪽의 쪽문, 마루의 창을 열면 사방으로 시야가 트이게 됩니다. 중앙에 마당을 지닌 이런 구조에 걸맞은 소통 구조가 아닌가 싶습니다. 벽으로 사방이 '꽉' 막힌, 창이 있어도 냉난방을 위해 '꼭' 닫힌, 고층의 거대한 몸짓으로 대기를 '꾹' 누르고 있는 상태인 대형 빌딩들의 구조와는 정 반대의 열린 구조입니다. 이런 곳에서 자연스러움과 평온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지도 모르겠습니다.

상고직사의 마루는 넉넉합니다. 마루 뒤쪽으로 뜨락을 보여 주는 문이라고 할 창이 있습니다. 넓은 마루에 어울리게 넉넉한 크기로 되어 있습니다. 부산하게 움직여야 했을 일꾼들에게도 뒤 뜨락도 자주 들락거릴 곳이었겠지요. 암서헌의 관망을 위한 창과는 다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도 더 많은 경우 창의 역할을 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강당인 전교당은 뒤쪽이 여러 짝의 문으로 완전히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창의 역할도 겸비합니다.

한옥의 마루는 개방형 구조가 본질입니다. 마루는 교차와 머무름에 상응하는 장소입니다. 휴식과 만담과 일이 공존하고 교차합니다. 그런 곳에 막힌 구조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처소에 걸맞게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의 창들을 보았습니다. 조화란 아름다움의 다른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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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번역은 지금 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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