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묘장에서 자라고 있는 10년생 황칠나무. 아래쪽에 무성한 식물은 뇌원차나무오창석
중국의 사서에 백제에서 가져다 썼다는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많은 문헌에 황칠이 등장하지만 정작 우리 땅에서는 100여년 전부터 명맥이 완전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칠은 한반도의 서남해지방에서만 자생하는데다가 그 생산량도 미미하기 짝이 없어, 그 희소성으로 인해 엄청난 수탈과 노역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다산 정약용의 시에 씌어 있기를 ‘백성들은 이 황칠나무를 악목(惡木)이라 하여 모두 베어 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그 전통 또한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황칠은 정순태씨의 15년여,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노력을 통해 5만여평 3만여 그루의 황칠나무 숲으로 환생하게 되었다. 또한 과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황칠은 도료의 기능만이 아닌 염료, 향료, 신약, 전자파흡수제 등의 미래산업으로서의 가치까지 인정받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순태씨가 기거하는 아침산막은 황칠나무 숲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안식향, 하루내 피워 두는 쑥연기의 향으로 그윽하기 그지 없다. 거기에다 황칠나무 밑에서만 자란다는 ‘뇌원차(腦原茶)’까지 곁들여지니 선계(仙界)가 따로 없다.
“성씨(姓氏)라는 것이 핏줄에 따라 편을 가르고 학연, 지연 같은 것도 생겨나 사는 것을 제약하니 나는 내 이름을 ‘산마을’로 바꿀 생각이오. 아들은 떡 ’적’ 자를 써서 ‘산적’, 아내는 ‘오는비’ 어떻소? 내 생각이?”
우산(愚山 - 우공이산에서 따 왔을 그의 號)다우신 말씀인데 오는비 여사께서는 남편 말씀에도 무심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수박을 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