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첫 벼베기가 시작됐습니다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09.17 09:51수정 2003.09.17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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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박철

오늘 오후 아내와 함께 텃밭에 나가 김장용 알타리 무씨를 심고 있는데, 트랙터가 요란한 굉음을 내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트랙터 짐칸에 뭘 잔뜩 싣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짐 위에 우리 교회 서순종 장로님이 앉아있는데 모양새가 아무래도 수상쩍었습니다. 내가 큰 소리로 그 자루가 뭐냐고 물었더니, 지금 벼를 베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짐작한 대로였습니다.


알타리 무씨를 심다말고 논으로 내처 달려갔습니다. 벼를 베는 집은 우리 동네 서현진 이장네 집이었습니다. 벼 베기가 한참 진행중이어서 논 한가운데 큰 길이 나있었습니다. 옛날 중 고등학교 시절, 장발단속에 걸리면 선생님이 이발기계로 머리 한가운데를 고속도로라며 밀어놓았는데 꼭 그 모양이었습니다.

느릿느릿 박철

잠시 쉬는 틈에 이장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네요. 역시 이장님이라 벼 베기도 제일 먼저 시작하셨네요. 그래 올 작황이 어떤 것 같아요?”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시다.”
“올해 비가 많이 와서 소출이 줄지 않을까요?”
“그러게 말이시다. 하루걸러 비가 왔으니. 그래도 매상자루 나오는 것 보니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은데, 다 베어 봐야지요.”

옆에서 자루를 나르던 유대 아빠가 한마디 거듭니다.
“올해 틀렸어요. 비가 좀 왔어야지요. 그나저나 오늘부터 한 달 동안은 죽어 났시다. 벼 베야지. 자루 담아서 건조장까지 날라야지. 건조장에서 온도 맞춰 말려야지. 방아 찧어야지. 아이고, 이제 오줌 똥 못 가리게 됐시다. 그나저나 쌀금이 좋아야 할 텐데. 쌀금은 점점 떨어지지, 이래 갖고 누가 농사짓겠시까? 배운 이 짓이라고, 딴 건 할 수 없고 죽자 살자 땅에 매달렸는데 그나마 농사도 글러버린 것 같시다.”

느릿느릿 박철

아무래도 날씨가 흐리고 꾸물꾸물해서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서현진 이장은 다시 콤바인에 올라탔습니다. 오미마을 이승용씨는 쌀자루를 받아주는 조수 노릇을 하고, 서순종 장로님과 유대 아빠는 추수한 벼 매상자루를 트랙터에 실어 건조장까지 나르는 작업을 합니다. 일하는 손이 기계처럼 척척입니다.

첫 벼 베기 하는 걸 구경나온 구원이는 메뚜기를 잡으려고 논두렁 사이를 뛰어다닙니다. 무학리 저수지 쪽에서 오리 떼가 하늘을 솟구쳐 날아오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지석리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중고등학생들 학교수업이 끝났는지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지나가고, 바로 뒤따라 버스를 놓쳤는지 여학생 둘이 트럭 짐칸에 올라타서 지나갑니다. 내가 사진기를 들이댔더니 부끄러운지 입을 막고 웃습니다. 웃는 모습이 싱그럽고 보기 좋습니다.

느릿느릿 박철

볏 자루를 실은 트랙터를 쫓아서 건조장까지 왔습니다. 건조장도 오늘 개시하는 날입니다. 추수한 볏 자루를 열어 건조장 탱크에 부어넣는데, 이장부인의 손놀림이 남정네들보다 빠릅니다.


이제 황금물결 이루던 들판이 농부들의 바쁜 손놀림에 의해 거무스름한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쌀금이 떨어질까 봐 조심도 많지만, 그래도 농부들의 마음만큼은 넉넉해질 것이고 부자가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같은 대지의 사랑과, 조상 대대로 땅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의 마음, 바로 농심(農心입)니다.

이제 가을이 되자 해의 길이가 짧아졌습니다. 어느새 황산(黃山)너머 하늘은 저녁노을로 불게 물들었습니다.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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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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